[페어플레이를 합시다]박중훈/情이 담긴 ‘게임의 법칙’을…

  • 입력 2001년 12월 31일 17시 05분


영화를 만들 때 거의 모든 촬영스케줄은 주연배우를 중심으로 짜여집니다. 저의 경우 이른 아침엔 얼굴이 상당히 많이 붓는 편이라 영화사에선 가능하다면 운동이나 사우나로 조절할 수 있게끔 아침 촬영시간의 여유를 주고, 소리를 지르는 장면을 찍어야 할 날에는 제 목이 쉴까봐 그날 촬영분의 맨 마지막 부분에 연기하게끔 순서를 정해 주기도 합니다. 거듭된 촬영으로 몸이 지쳐 식당 가기도 힘들 정도가 되면 제작팀에서 식사를 현장으로 가져다 주면서 제 체력을 걱정해 주기도 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배우의 인격이 특별히 훌륭해서가 아니라, 영화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17년간 30여편의 영화를 통해 이런 상황에 익숙해진 제게 지난 봄 4개월간 프랑스 파리에서 ‘찰리의 진실’이라는 미국영화를 촬영했던 일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준 경험이었습니다. 그 영화에서 저는 30%정도의 출연분량을 가진 조연배우로 연기했죠. 당연히 영화촬영의 모든 진행은 같이 공연한 마크 월버그나 팀 로빈스 같은 할리우드 스타 위주로 짜여졌습니다.

한번은 몽마르트르언덕에서 5일밤을 새우면서 촬영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저는 영화 속에서 사랑하는 동료를 잃고 눈물을 흘리는 격한 감정을 연기해야 했습니다. 그런 미묘한 감정을 연기하려면 배우는 차분한 준비가 필요한데, 그들 위주로 진행되다 보니 언제 갑자기 연기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겉으론 늘 준비되어 있는 양 자신감있는 얼굴로 여유까지 부렸지만, 사실 컨디션 조절 때문에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릅니다.

같은 조건에서 연기로만 승부했더라도 낯선 할리우드 영화라서 힘겨웠을 텐데 다른 것에 상당한 에너지를 쏟느라 힘겨웠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우리나라에서 영화를 찍을 때 같이 공연했던 수많은 다른 동료 배우들이 제 중심으로 돌아가는 촬영 진행에 속으로 많이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들의 고충을 미처 깨닫지 못한 제가 부끄러워지기도 했습니다.

‘힘의 논리’에 의한, 즉 자신의 위치와 능력에 맞는 권리와 대우가 논리적으로 공평하기는 하겠지만 꼭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거죠.

남녀 화장실이 한 개씩 있을 때 장애인 화장실이 따로 한 개가 있다면 장애인과 비 장애인의 인구비례가 1 대 2이기 때문이 아닐 겁니다. 사용빈도나 수효 등 효율성으로만 따진다면야 설득력을 잃겠지만 장애인의 불편을 배려하려는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우리는 그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고, 또한 그것을 평등하다고도 보는 거지요.

진정한 의미의 ‘페어플레이’는 능력에 맞는 권리나 균등한 기회가 기본적 대 전제가 되겠지만, 그 속에 따뜻한 배려와 연민이 포함될 때 더욱 더 빛이 날 겁니다. 강자만이 그렇지 않은 자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정글의 법칙’이 통하는 동물의 세계와 우리가 사는 인간사회가 구별되는 것은 바로 그런 점 때문이 아닐까요.

박중훈(영화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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