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의 시세계]'하눌나라' 별이 된 부족方言의 마술사

  • 입력 2000년 12월 26일 19시 01분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선생이 운명하셨다. 지난 9월 황순원 선생의 작고에 뒤이어 우리 문학계의 큰 별이 다시 세상을 뜬 셈이다. 이로써 우리는 해방 이전부터 활동해온 대표적 원로 시인과 작가를 거의 동시에 잃어버렸다.

◇역사상 유례없는 多作◇

동시에 문학의 한 시대가 확실히 저물었다는 감회를 금할 길이 없다. 서기 2000년은 여러 가지로 기억되고 기록되겠지만 문학사(文學史)에서는 아마 이 나라 최고의 시인이 시 쓰기를 그친 해로 기억될 것이다.

습작기의 미숙한 작품을 제외한다면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壁)’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미당의 시력 65년은 정상에서의 끊임없는 모색과 변모와 성취의 기간이었다. 그동안 그는 통틀어 1200페이지를 웃도는 15권의 시집을 내 우리 역사상 유례없는 다작의 위업을 남겼다.

무잡한 다산성(多産性)은 상품의 졸속 대량생산과 상동관계를 이루지만, 정치하고 세련된 다산성은 그 자체가 벌써 그릇큼의 증좌이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는 그의 1000여편의 시업은 ‘단군 이래 최대의 시인’이라는 호칭을 극히 자연스럽게 만들어 준다.

‘부족 방언(部族 方言)’의 순화와 세련에 기여한 미당의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는 평생 오묘한 부족방언의 마술사이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그의 시와 산문을 읽지 않고 한국어 공부를 졸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상적으로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기의(記義)이지 기표(記表)가 아니다. 기표가 그대로 기억되는 시가 시의 본성에 가장 근접한 시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방황하고 모색하면서 뜻과 소리의 조화를 중시했던 ‘화사집’ ‘귀촉도’ ‘서정주 시선’의 시대가 미당의 최고 경지였다.

거기에 비하면, 에릭 홉스봄이 말하는 자가용(自家用) ‘전통의 창출’에 골몰하던 ‘신라초’ ‘동천’ 시대는 현실과의 괴리를 불가피하게 하는 형식화 지향의 시기였다. 독자에 따라 찬반과 호불호가 크게 갈라지기 마련인 시기이기도 했다.

◇무슨 소리를 해도 한편의 詩◇

회갑을 전후한 시기에 미당은 대담한 산문 지향을 통해 새로운 경지를 연 ‘질마재 신화(神話)’를 선보인다. 전통적 농경사회와 그 기층민 문화의 시적 탐구인 이 시집은 가장 독자적이고 성공적인 민중문학의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여기에서 자신을 얻은 미당은 우리 역사에서 취재한 ‘학(鶴)이 울고 간 날들의 시’와 시적 자필 이력서인 ‘안 잊히는 일들’을 선보여 다시 우리들을 놀라게 해주었다. 아무거나 붙들고 무슨 소리를 해도 시가 되는 득도(得道)의 경지에서 장르 귀속의 쟁점 따위는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미당은 청년기에 ‘시인부락’이란 시 동인지의 동인이었다. 반세기 후 그는 인용부호 빠진 이 나라 시인부락의 명실상부한 족장이 되었다. 생활인으로서의 미당의 행적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비판도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미당의 시를 읽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지 시인을 위해서가 아니다.

◇현대의 古典으로 숭상해야◇

어디서나 뛰어난 재능은 희귀한 법이다. 20세기 한국과 같이 척박하고 파란 많은 사회에서 한길로 정진해 전례없는 성취를 보여준 재능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진정한 의미의 살아있는 고전이 영세한 우리 터전에서 전범에 값하는 미당의 시는 현대의 고전으로 숭상되어야 한다.

모친이 90을 훨씬 넘기고 돌아가셨으니 불효를 면하려고 그 이상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평소 의욕을 보이셨다는데, 망구십(望九十)의 불효자 미당 선생은 기어이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너 가셨다.

거기는 ‘어쩌면 하눌나라일 것이다. 연한 풀밭에 벳쟁이도 우는 서러운 서러운 시굴일 것이다’(‘귀촉도’에 실린 ‘무제’ 중). 삼가 선생의 명복을 빈다.

유종호(문학평론가·연세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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