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음악축제]프랑스 오랑주 축제

  • 입력 2000년 7월 26일 18시 41분


94년부터 매년 유럽의 음악 페스티벌과 극장을 순례하며

다양한 예술체험을 쌓아온 음악애호가 박종호씨의 예술기행

‘유럽의 음악축제’를 연재합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인 박씨의 ‘유럽의 음악축제’는 과거와 현재, 여행과 예술, 감동과 즐거움이 만나는 현장으로 독자를 안내할 것입니다.<편집자>

코끝에는 오렌지가 익어가는 향내가 스치고, 눈앞에는 고대의 유적에서 오페라의 장관이 펼쳐진다. 얼마나 멋진 일일까.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조용한 도시 오랑주. 포도와 오렌지 밭으로 둘러싸인 이곳에는 1세기 로마제국의 전성기 때 건립된 개선문과 고대 야외극장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보존되어 관광객을 맞고 있다. 매년 7월 많은 세계인이 다투어 이 곳을 찾는 이유는 바로 야외극장에서 열리는 ‘오랑주 음악축제’ 때문이다.

131년 전 야외극장에서 여름 콘서트가 시작되었고 현재와 같은 국제적 축제가 시작된 것 만도 금년으로 30회가 된다. 루이 14세가 ‘내 조국에서 가장 훌륭한 벽’이라고 칭송한 무대 뒷면 벽은 높이 38m, 가로 103m의 거대한 석벽으로 뛰어난 음향을 빚어낸다.

작년에는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 공연소식이 나를 흥분시켰다. 74년 이곳에서 소프라노 몽세라 카바예가 부른 ‘노르마’ 실황녹음은 지금도 대표적 명반으로 꼽힌다.

그 후 25년만에 이 난곡을 연주할 새 디바가 나타났으니 소프라노 신성 마리아 굴레기나라는 것이다. 흥분되는 가슴을 억누르며 오랑주에 도착하자마자 극장으로 달려갔는데 아뿔사. 극장 앞에는 ‘오늘 미스 굴레기나가 사정상 노래할 수 없습니다’라고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실망한 가슴을 달래며 카페에서 요기를 하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너무나 조용한 거리가 이상할 정도였다. 오페라를 감상할 사람들은 모두 어디 갔을까?

이윽고 해질 무렵이 됐다. 어디서 나타났을까. 도시는 성장을 한 남녀로 골목골목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한가하던 공터에는 테이블들이 잔뜩 차려지고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마을의 여관들마다 ‘방 없음’이라는 표지가 걸렸다.

날이 어두워지자 그 많은 사람들은 2000년이나 그곳을 지켜 온 거대한 고대 극장으로 물살이 빨려들듯 들어가기 시작했다. 높은 반원형의 스탠드는 곧 꼭대기까지 가득 찼다. ‘노르마’는 바로 2000년 전 로마의 압제에 시달리던 갈리아인(프랑스 원주민)들의 이야기였으니, 로마시대에 세워진 극장은 그 자체로 바로 ‘노르마’의 완벽한 세트였다.

이윽고 이 날의 프리마 돈나인 ‘대타’ 하스믹 파피안이 등장했다. 무대를 압도하는 그녀의 풍모에 굴레기나에 대한 미련도 사라졌고 밤하늘 너머 퍼져가는 아리아 ‘정결한 여신이여’의 신비한 멜로디는 관객 모두를 아련한 2000년전 꿈 속의 나라로 데려가고 있었다.

박종호<신경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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