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이끌 감독들]이정향/'재미' 일깨우는 차세대주자

  • 입력 2000년 1월 27일 19시 14분


90년대 전반을 풍미한 로맨틱 코미디가 장르의 사망을 선언한 것처럼 보이던 98년 크리스마스 무렵, 여감독 이정향은 ‘미술관옆 동물원’에서 90년대 한국의 로맨틱 코미디 10여편이 달성하지 못했던 성취를 단박에 이뤄내며 단 한 편의 영화로 스타감독이 되었다.

‘미술관옆 동물원’은 로맨틱 코미디의 핵심인 남녀의 티격태격 연애담을 화사한 화면과 재치있는 대사, 상징화된 소품과 공간으로 맛깔스럽게 포장한 영화다. 포장 속의 알맹이 역시 들여다 볼수록 내밀한 성찰을 담고 있다. ‘도대체 영화를 만든다는 것, 시나리오를 쓴 다는 것이 인생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감독 자신의 일에 대한 근원적 통찰, 그리고 이 시대 애정담론을 보여주는 새로운 섹슈얼리티 전략과 신세대적인 감각이 들어 있다. 공간 자체에 대한 상징적 표현도 남다르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명멸해간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가 이뤄내지 못했던 성(Gender) 역할 캐릭터의 혁신을 단번에 성취한 데에 있다.

이정향이 그려낸 캐릭터는 로맨틱 코미디의 여주인공에 대한 통념(예쁘고 단정하고 의존적인 여성)을 뒤집으며 마치 거리에서 툭 튀어나온 것같은 생생한 현실감을 보여준다. 결혼식 비디오 촬영기사인 춘희(심은하)는 귀찮아서 양말도 안신고 컵을 다 깨뜨려 물도 병째 마시고, 머리도 대충 빗는데다 옷도 일하기 편한 것만 골라 입는다. 잘 때도 화장하고 머리를 단정하게 하는 예쁜 여성 캐릭터만 그려온 한국영화의 빈 틈을 정확하게 비집고 들어간 이정향은 여성인물이 살아있는 매력적인 영화를 만들어 냈다. 이 영화로 심은하는 연기력 있는 배우로, 상대역인 이성재도 가능성 있는 신인으로 인정받았다. 신인배우가 임권택 감독같은 대가에 의해 크는 경우는 있어도, 신인감독은 스타급 배우의 덕을 보는 게 일반적인데 그는 이런 도식을 과감하게 깨트렸다. 이런 점에서 이정향 감독의 배우 연출력은 중견감독의 역량을 능가한다.

이정향은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큰 메시지를 담은 영화보다 평범한 이웃과 교감하는 작고 개인적인 영화가 체질에 맞다고 밝힌 적이 있다. 각론과 구체성 없는 공허한 거대 담론이 횡행했던 지난 시대를 되돌아볼 때 이정향의 이런 취향은 신세대 감독다운 개성을 보여준다. 무겁고 진지한 주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공기처럼 가벼우면서도 삶에 대한 성찰을 담은 영화, 거기에 유머 감각까지 겸비한 여유를 보여주는 이정향식 영화만들기는 한국영화의 빈 틈을 메워나가는 첫 삽이다. 그는 영화세상의 재미를 일깨워줄 차세대 주자이다.

유지나(동국대 교수·영화평론가)

▼이정향감독 약력▼

△64년생 △87년 서강대 불문과 졸업 △88년 한국영화아카데미 4기 수료 △88년 단편 ‘내 이름은 상우’ 각본, 작곡, 연출. 서울올림픽 공식기록영화 조감독 △97년 ‘미술관옆 동물원’ 시나리오 청룡영화제 시나리오부문 당선 △98년 ‘미술관옆 동물원’ 각본, 연출 △99년 대종상 신인감독상, 청룡영화제 각본상, 영화평론가협회 신인감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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