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EBS, 토론프로「논리」는 없고 말싸움만…

  • 입력 1999년 3월 15일 19시 54분


토론프로가 시청자들을 화나게 만들고 있다. EBS가 13일 밤 생방송한 ‘난상토론―호주제, 남녀 성비 불균형의 원흉?’이 대표적인 예.

고은광순 김광식 조준하 박재희씨 등 패널리스트들은 자신의 논리를 차분하게 전개, 상대방을 납득시키기보다는 상대의 말을 일방적으로 끊어버리거나 논점을 비켜갔다.

“머리가 좋으신 분들이라면…” 등 인신공격성 발언도 많았다. 토론의 기본규칙도 지켜지지 않은 토론이었다.

감정적인 말싸움으로 흐른 탓에 논지가 흐트러져 정작 토론의 주제인 ‘호주제와 남녀 성비 불균형의 관계’는 논리적으로 규명하지 못한 채 서둘러 방송을 끝내야 했다.

시청자들은 호주제 폐지와 존속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지닌 토론자들의 다각도의 토론을 기대했다. 그러나 토론 시작 10여분 뒤부터 흥분한 목소리와 시비만 오가는 통에 짜증스럽다 못해 실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토론의 수위와 가닥을 잡아나가야 할 진행자 송지헌은 그 흥분된 분위기에 끌려다니다시피 했다. 오히려 방청석에서 의견을 개진한 두 대학생이 훨씬 더 성숙한 모습을 보였고 시청자 전화도 토론의 파행적인 진행을 나무라는 내용이 많았다.

이 프로는 정견발표식의 기존 토론프로와의 차별화를 겨냥해 지난해 9월 시작됐다. 생활 속에서 부닥치는 문제를 주제로 선정, 명확한 찬반 입장을 전달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토론이 아니라 싸움판같다” “질서가 없다”는 지적이 만만찮아 연출진이 고민을 계속하고 있는 실정.

우선 패널리스트 선정 문제. 13일 방영에서도 몇몇 토론자는 시종일관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연출진은 “분명한 입장을 생방송에서 그대로 말할 토론자를 찾다보니 선정 폭이 넓지 못하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출연자 선정에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는 지적은 피하기 힘들다.

또 토론자들을 두편으로 갈라 벌이는 논전은 토론자들에게 ‘제삼의 길’을 택할 여지를 주지 않아 반대를 위한 반대를 유도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발언시간제한 반대발언 보충발언 등 토론을 올바르게 진행할 수 있는 정교한 규칙을 도입해 흥분과 비난을 통제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제작진은 “인신 공격 등을 자제해달라고 사전에 아무리 부탁해도 토론 문화에 익숙지 않아서인지 제대로 안된다”고 고충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방영 7개월 동안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음에도 여전히 같은 지적을 받는다면 EBS가 ‘싸움을 보는 재미’를 무기삼아 시청률 올리기를 겨냥한다는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허 엽기자〉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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