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와르 영화「LA컨피덴셜」, 악녀이미지 뒤집기

  • 입력 1998년 3월 18일 08시 00분


지금 할리우드의 유행색은 검은 빛. 최근 뉴욕타임스는 아카데미상 9개 부문 후보에 오른 ‘LA컨피덴셜’과 함께 할리우드에서 필름 누아르(Film Noir)가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음을 알렸다.

40, 50년대 미국에서 전성기를 누렸던 범죄 스릴러영화, 프랑스 비평가들이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을 일컫는 자기나라말 ‘로망 누아르’에서 이름을 따온 이 영화장르가 20세기말 왜 권총을 물고 돌아왔을까.

“누아르는 영화작가가 다층적 인물묘사와 가슴을 찌르는 비정한 대사 등을 놓고 한껏 극작 기술을 발휘할 수 있는, 할리우드에 남은 유일한 장르이기 때문”이라고 뉴욕타임스는 분석한다. 미국에서 누아르의 유행은 노스탤지어를 뜻한다. 엄청난 물량공세로 만들어낸 스펙터클, 언제나 미국의 승리로 끝나는 권선징악의 구도로는 담아낼 수 없는 삶에 대한 통찰이 거기 있다.

누아르는 언제나 나름의 공식을 지닌다. 무대는 부패와 위험의 도시. 내면의 상처를 지닌 정의로운 영웅이 악을 무찌를 준비를 하고 있고 그 남자를 사건에 끌어들여 급기야 파멸로 몰아가는 팜 파탈(Femme Fatale·요부)이 늘씬한 허벅지를 드러낸 채 요염하게 서있다. 그리스신화에서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하는 판도라처럼.

‘LA컨피덴셜’에서 고전적 누아르의 공식에서 유일하게 비켜나 있는 것이 팜 파탈, 킴 베이신저다. 누아르의 화려한 부활을 외치는 영화이면서도 여배우의 역할만은 기존 누아르와 판이한 모습을 그리고 있어 흥미롭다.

국회의원 경찰간부 고급공무원 등 고위층을 상대로 한 고급 매춘부 킴 베이신저는 요부나 악녀라기보다 그저 예쁘고 순수한 여자다.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 팜 파탈의 역할인데 그는 백치처럼 내막을 전혀 모르고 있다. 영화가 다 끝날 때까지 “저 여자가 뭘 알고 있겠거니”하고 믿은 관객을 철저히 배반한다.

전통적 팜 파탈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베이신저가 남자를 파멸시키기는커녕 ‘영광의 상처’를 입은 그 남자와 함께 시골로 떠난다는 데 있다. 예쁠 뿐만 아니라 착하다. 나이가 있으니(베이신저는 45세이다) 푸근하기까지 하다.

정통적 누아르에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무기로 남자의 질서에 도전할 만큼 지적이고 강력한 팜 파탈, 기존의 통념을 뒤엎는 텍스트로서의 여성 이미지와는 완전 딴판이다.

시네 페미니즘을 연구하는 평론가 김소영씨(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교수)는 “킴 베이신저는 안전핀을 단단히 붙인 수류탄처럼 모든 위험성을 제거한 여자”라고 분석했다. 누아르의 부활은 좋되 기존 팜 파탈은 더 이상 감당하기 싫은 현대 남성의 심리를 반영했다는 풀이다.

40, 50년대의 팜 파탈은 그 당시 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반영했다. 전쟁통에 여자들은 남자대신 일터로 나가면서 강인하고 독립적으로 돼버렸고 전쟁이 끝난 뒤 남자들은 여자를 가정으로 되돌려보내고 가부장 질서를 회복하느라 무진 애를 써야했다.

그러니 영화 속 팜 파탈은 남성지배 세계에 혼란과 불안정을 몰고왔다는 식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죽음의 징벌을 받았다. 단두대에 보내지지 않은 팜 파탈은 81년 ‘보디 히트’ 등 손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90년대 말의 팜 파탈은 이와 정반대다. 한때 섹스 심벌로 여겨졌던 베이신저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까지 바라보고 있다. 21세기 번영의 땅 미국이 원하는 여성상은 ‘위험하지 않은 여자’인 것일까.

〈김순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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