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집 가구 분해된 채 창고에 4개월째’ 전세사기에 날아간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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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년 4월 25일 07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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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차인들이 전세보증금 피해를 주장하는 울산 남구의 한 오피스텔. 뉴스1
임차인들이 전세보증금 피해를 주장하는 울산 남구의 한 오피스텔. 뉴스1
“지난해 12월 다른 집으로 이사 가려고 계약금을 걸었는데 이사 전날까지 전세보증금이 안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임대인(당시 부동산중개회사) 사정이 있겠거니 기다렸는데 뒤통수를 맞은 셈입니다. 이사 가려던 집 계약금 700만원도 날리고 1억5000만원 전세보증금도 돌려받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R 건설사가 지은 울산 남구의 오피스텔 임차인 A씨(30·여)는 남편과 함께 신혼부부 전세자금 대출 9000만원과 집안 어른에게 빌린 6000만원을 모아 2020년 12월부터 이 오피스텔에 전세로 살기 시작했다. 전셋집이긴 했지만 두 사람이 부부생활을 시작한 ‘첫 집’이기에 좋은 추억도 많았다.

하지만 지난해 8월 ‘집주인이 R 건설사에서 부동산중개회사로 바뀌었다’는 R 건설사의 연락을 받은 뒤 희망으로 가득 찼던 두 사람의 신혼생활은 불안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어 지난해 12월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이사 들어가려던 집 계약금 700만원과 이사 취소 위약금 20만원을 날린 뒤 A씨의 심정은 “참담했다”고 한다. A씨가 새집에 들이려던 가구 300만원어치는 분해된 채 창고에 처박힌 지 4개월째다.

A씨는 “일이 터지고 난 뒤 처음에는 ‘대단지 아파트로 가자고 하지 않았느냐’며 남편을 원망하기도 하고 서로 다투기도 했다”며 “지금은 남편과 서로 의지하면서 어려움을 헤쳐 나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비슷한 피해를 호소하고 함께 대응에 나선 오피스텔 이웃들도 A씨에게 힘이 되고 있다. A씨는 “이웃분들과 교류할 일도 없었고 인사도 잘 하지 않았다”며 “이제는 ‘저분도 혹시 피해자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먼저 말을 걸기도 한다”고 했다.

이 오피스텔 임차인들의 전세보증금 피해 사례는 비슷했다.

원래 집주인이었던 R 건설사와 전세계약을 맺었고 집주인이 R 건설사에서 부동산중개회사로 바뀐 사실을 뒤늦게 통보받거나 아예 통보받지 못했다.

그런데 새 주인인 부동산중개회사는 자본금 100만원에 불과한 ‘페이퍼 회사(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회사)’였다. 부동산중개회사 관계자들은 이미 사기 혐의로 구속 송치된 상태다.

울산 남구의 한 오피스텔 임차인이 24일 오후 2시께 울산경찰청에서 R 건설사의 사기 혐의를 주장하는 내용의 고소장을 내고 있다. 2023.4.24 뉴스1
울산 남구의 한 오피스텔 임차인이 24일 오후 2시께 울산경찰청에서 R 건설사의 사기 혐의를 주장하는 내용의 고소장을 내고 있다. 2023.4.24 뉴스1
임차인들은 부동산중개회사 측 계좌로 입금한 전세보증금 일부 또는 전액을 돌려받지 못했거나 날릴 위기에 놓인 것이다. 피해 호소 임차인들은 대부분 ‘내 집 마련’을 비롯해 꿈 많은 30대 청년들이었다.

임차인 B씨(30·남)는 울산에서 직장을 잡으면서 수도권에서 울산으로 내려왔다. 현재의 아내와 함께 살 신혼집을 알아보던 중 2021년 7월 이 오피스텔에 전세보증금 2억원, 가전제품 보증금 500만원을 걸고 이사 왔다. B씨가 이 오피스텔에 들어오기 위해 낸 대출금은 1억6000만원이다.

R 건설사에서 부동산중개회사로 집주인이 바뀐 사실을 B씨가 알게 된 시점은 올해 3월께다. 다른 임차인들이 2022년 8월에 받은 문자 통보조차 B씨는 받지 못했다. B씨는 오는 7월 전세계약 만료를 앞두고 다른 집으로 이사 가기 위해 오피스텔 등기부등본을 떼어본 뒤에야 집주인이 바뀐 사실도, 압류가 걸린 사실도 알게 된 것이다.

B씨는 부랴부랴 부동산중개회사에 연락했지만 부동산중개회사는 연락받지 않았다. 오피스텔 관리사무소에 확인해 보고 부동산중개회사 관계자들이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B씨는 “내 집을 마련할 계획에 들떠있었고 오피스텔 퇴거 의사를 알리려고 한 건데 집주인이 바뀌고 압류까지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며 “여기 울산까지, 먼 타지역까지 와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안 좋은 일까지 당해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고 말했다.

B씨는 전세계약 만료까지 3개월의 시간이 남았다. 하지만 전세보증금을 절대 잃을 수 없기에 일찌감치 변호사를 선임해 건설사를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B씨는 “변호사 선임비가 700만원으로 적지 않았지만 전세보증금을 잃을 수 없다”며 “돈 몇백 아끼려다 전 재산을 날릴 수는 없지 않느냐”고 했다.

분양 당첨으로 내 집 마련을 눈앞에 둔 임차인 C씨(39·남)도 오는 7월 오피스텔 전세계약 만료를 앞두고 있다. C씨는 내 집 마련을 위해 전세살이를 이어왔고 2021년 7월 이 오피스텔에 들어왔다.

전세살이에 인이 박인 C씨는 이 오피스텔 전세계약을 하기 전 부동산중개회사 측과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보증보험 가입 여부도 확인했다. 계약한 직후에는 확정일자를 받고 전입신고도 진행해 우선변제권 요건도 갖췄다.

하지만 잔금을 치르려고 보니 부동산중개회사 측은 보증보험 가입이 안 된다고 말을 바꿨고 B씨는 이미 계약금을 1000만원 넘게 넣었던 탓에 계약을 해제하기도 어려웠다.

C씨는 2022년 8월 R 건설사로부터 ‘집주인이 부동산중개회사 관계자로 바뀌었다’는 연락받았는데 그때만 해도 단순 투자 목적의 매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달 중순께 부동산을 구하는 지인을 따라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돌아다니다 거주 지역에서 전세사기가 발생한 사실을 알았고 등기부등본을 떼어보니 본인이 살던 오피스텔이었다.

등기부등본을 확인하고서야 새로운 집주인이 부동산중개회사 관계자가 아닌 법인인 점과 압류 사실을 알았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C씨가 전세계약을 체결한 지 단 ‘3일’ 만에 집주인이 바뀌었다는 점이었다.

C씨는 “다른 임차인들 피해 상황을 확인해 보니 계약 시기만 다르지 대부분 비슷했다”며 “오피스텔 전세를 놓은 사람(R 건설사)이랑 그걸 중개한 사람(부동산중개회사)이 사실상 짜고 친 것 아니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어 “‘내년 7월이면 드디어 내 집이 생긴다’ ‘마지막 전세다’ 생각하며 살았는데 사기당했다는 걸 처음 알고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며 “분양받은 집 계약금 10%도 냈고 중도금 대출 이자도 나가고 있는데 잔금을 못 치르면 어떡하나 걱정된다”고 말했다.

피해 호소 임차인들과 부동산업계 관계자 등에 따르면 해당 오피스텔 중개 거래는 문제의 부동산중개회사에서 독점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R 건설사는 사실상 자격 미달의 부동산중개회사에 오피스텔 중개를 의지했고 일부 오피스텔을 넘기기도 했다.

이 오피스텔 인근에 있는 공인중개사사무소 소장 D씨는 “해당 오피스텔은 지을 때부터 입지나 구조 때문에 미분양이 날 거라는 우려가 컸고 R 건설사에서 오피스텔 물건을 중개해달라고 요청해도 안 하는 공인중개사들이 많았다”며 “해당 오피스텔 물건이 시세에 비해 싼값에 나오다 보니 젊은 임차인들이 많이 들어간 것 같다”고 말했다.

(울산=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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