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남 이건희는 어떻게 삼성 2대 회장이 됐나…나이보단 ‘능력’ 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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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년 10월 25일 17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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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삼성 신경영’ 선언 당시 이건희 회장.© 뉴스1
1993년 ‘삼성 신경영’ 선언 당시 이건희 회장.© 뉴스1
25일 타계한 이건희 회장은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셋째 아들임에도 1987년 2대 회장에 올라 당시 재계 인사들을 놀라게 했다. 그가 첫째 형인 CJ그룹의 이맹희 회장, 둘재 형인 새한그룹의 이창희 회장을 제치고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후계자로 낙점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맹희 회장과 이창희 회장이 부친 이병철 회장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삼성에 정통한 재계 인사들은 무엇보다 ‘능력’을 우선시한 삼성의 조직 문화가 후계자를 정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된 것으로 본다. 삼성은 1957년 1월, 민간 기업 최초로 공개 채용 제도를 도입해 27명의 사원을 채용했고, 이건희 회장은 1995년 공채의 학력제한을 폐지하는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이건희 회장은 후계 수업을 받던 시절이 1974년, 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반도체 인수에 “제 사재를 보태겠다”며 적극적으로 나섰고, 1986년 7월 1메가 D램을 생산하는 결실을 맺는 등 능력을 보여주며 이병철 회장을 흡족케 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이병철 회장이 1982년 미국 IBM, GE, 휴렛-팩커드의 반도체 조립라인을 돌아본 뒤 ‘너무 늦었다’며 낙담할 때에도 이건희 회장은 부친을 설득, 오늘날 세계 1위의 메모리 반도체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건희 회장이 전자제품, 각종 기계류 관련 공학 서적을 탐독하고 직접 제품을 분해해가며 주요 글로벌 기업들과 삼성 제품의 기술 격차의 원인을 직접 찾으려 연구를 거듭했다는 것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회자되는 이야기다.

이건희 회장은 비교적 젊은 나이인 1987년 45세의 나이에 총수에 올랐음에도 불구,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주며 삼성을 이끈다. 이건희 회장이 총수에 오른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는 냉전이 종식되고 글로벌 경쟁이 가열되기 시작한 때로 이건희 회장은 당시의 삼성이 변화에 뒤처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후쿠다 삼성전자 디자인 고문과의 밤샘 대화 등 외부인의 시각을 적극 수용하며 삼성의 문제점을 다각도로 파악한 이건희 회장은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켐펜스키 호텔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보라”는 말로 유명한 ‘프랑크푸르트 선언’, 즉 ‘삼성 신경영’을 선언한다.

이 같은 혁신을 위한 노력 끝에 삼성은 1997년 한국 경제가 맞은 사상 초유의 IMF 위기와 2009년 금융 위기 속에서도 성장을 거듭한다. 2020년 브랜드 가치는 623억 불로 글로벌 5위를 차지했고 스마트폰, TV, 메모리반도체 등 20개 품목에서 월드베스트 상품을 기록하는 등 명실공히 세계 일류기업으로 도약한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이 연공 서열식 인사 기조가 아닌 능력급제를 시행하는 것은 이건희 회장의 불합리한 인사 차별을 타파하겠다는 열린 인사 지시에 따른 것”이라며 “이는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이건희 회장 스스로 연공 서열이나 학력이 아닌 열의와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몸소 겪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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