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초백’ 저물고 ‘어글리’ 뜨고…파이세대 “나만 좋으면 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29일 16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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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년차 직장인 나성현 씨(29·가명)는 운동화를 100켤레 이상 가진 ‘슈즈 콜렉터’다. 한 켤레에 100만 원을 웃도는 명품 브랜드 운동화도 여럿 있다. 그럼에도 또 다른 운동화를 사기 위해 매달 20만~30만 원 씩 적금을 붓는다. 요즘 그의 관심을 끄는 제품은 ‘어글리 슈즈’라 불리는 독특한 디자인의 운동화다. 그는 “사람들은 10만 원도 아까운 못생긴 운동화라고 말하지만 100만 원을 주고 사도 나만 좋으면 되는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2. 회사원 김경준 씨(30)는 작년에 5000만 원 가량의 수입차 벤츠를 할부로 샀다. 함께 사는 부모님으로부터 ‘장가는 언제, 무슨 돈으로 가나’ 하는 시선을 받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는다. 어차피 회사원 월급 모아 집을 사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김 씨는 “차는 늘 타고 다니면서 내 개성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수단”이라고 말했다.

개성이 강하고 경험을 중시하는 ‘파이(P.I.E)세대’가 주 소비층으로 떠오르면서 소비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특히 명품 패션, 경험용 여행, 과시용 수입차 등에서 이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 ‘3초백’ 저물고 ‘어글리’ 뜨고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패션 브랜드는? 루이비통, 샤넬을 떠올리면 기성세대다. 파이세대는 2012년 만들어진 신생브랜드 ‘오프-화이트’라고 답한다.

29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매분기 전 세계 패션브랜드의 인기순위를 발표하는 온라인 쇼핑 검색 플랫폼 리스트(Lyst)가 올 3분기(7~9월) 500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오프-화이트, 구찌, 발렌시아가가 1~3위를 차지했다. 이들은 독특하고 개성 있는 디자인을 앞세워 젊은 층에게 각광받고 있다.


컨설팅 기업 베인앤컴퍼니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명품시장에서 32%에 불과했던 Y·Z세대(1980년대 이후 출생·파이세대)의 영향력은 2025년 55%까지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모바일 환경에 익숙한 이들이 큰손으로 떠오르면서 오프라인 매장을 고집하던 명품 브랜드들은 잇따라 온라인 매장을 열고 있다. 김혜라 롯데백화점 해외패션부문 상무는 “10여 년 전에는 눈에 띄는 로고 때문에 3초마다 한 번씩 길거리에 보였던 ‘3초백’(루이뷔통의 스피디)이 대세였지만 요즘은 ‘그 제품 어디 꺼야?’라고 묻는 게 칭찬이 됐다”며 “희소한 디자인의 제품으로 개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젊은층이 명품의 주 고객층이 되면서 백화점도 독특한 콘셉트의 브랜드를 발굴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 유명 관광지보다 현지 경험

경험을 중시하는 파이세대는 여행시장도 견인하고 있다. 하나투어에 따르면 자유여행을 위해 항공권을 구매한 20, 30대는 2014년 26만여 명에서 올해 57만여 명으로 늘었다.

파이세대는 새로운 여행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혼행(혼자서 여행)’에서 더 나아가 여행 목적지가 같은 낯선 사람과 만나 함께 여행을 떠나는 ‘따로 또 같이’ 여행도 등장했다. 이들은 온라인 카페나 여행 커뮤니티 등에서 동행자를 찾은 후 일정을 정하거나 각자 자유여행을 하다가 정해진 날짜에 특정 장소에서 만나는 계획을 잡는다.

대형 여행사도 파이세대를 위한 맞춤 상품을 내놓았다. 하나투어는 9월 20~39세까지만 예약할 수 있는 ‘2030 여행팩’을 내놨다. 여행사를 통해 또래 동행자를 구한 후 혼자 가기 어려운 근교 관광지를 함께 방문하거나 여럿이서만 예약할 수 있는 체험 일정을 소화하는 상품이다. 공유 숙박업체 에어비앤비는 최근 공유 숙박은 물론 현지인 모임에 참여하거나 전문 자격증이 있는 집주인과 함께 현지 문화를 체험하는 ‘에어비앤비 트립’을 내놨다.


● 고급 차거나 공유차거나

나의 만족을 위해 스스럼없이 지갑을 여는 파이세대는 고급 차 분야에서도 큰 손으로 떠올랐다. 한국수입차협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수입차를 가장 많이 산 연령대는 30대로 전체의 약 30%를 차지했다. 20대도 약 13%였다. 수입차 업체들은 파이세대의 눈높이에 맞춘 전략을 내놓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한 일렉트로닉댄스뮤직(EDM)페스티벌의 메인 스폰서로 참여해 파이세대와 접점을 강화하고 있다.

차를 소유하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는 또 다른 파이세대는 자신이 필요할 때만 차를 빌려 쓰는 공유차시장을 키우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2011년 약 6억 원 규모였던 국내 공유차시장은 2020년엔 5000억 원 규모로 커질 전망이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파이세대가 무분별한 소비를 한다는 오해가 많지만 자신이 가치를 두는 부분에만 투자하고 나머지는 아예 안 써버리는 양면성이 이들의 특징”이라며 “경제활동에 뛰어든 이들의 소비력이 커진 만큼 시장의 변화는 더 넓고 빨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손가인기자 gain@donga.com
염희진기자 salthj@donga.com


▼ 밀레니얼 세대 분석 ▼

“곧 밀레니얼세대가 글로벌 소비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시대가 온다.”

밀레니얼세대와 관련해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한 3명의 전문가가 공통으로 한 말이다. 밀레니얼세대는 21세기에 성인이 된 2030으로 본보가 정의한 파이세대를 말한다.

최정규 누리매니지먼트 디렉터는 29일 명품 브랜드 구찌의 사례를 들며 밀레니얼세대의 소비력을 설명했다.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최 디렉터는 ㈜화제인이 주최한 ‘트렌드 스토리 2019’에서 밀레니얼세대를 주제로 강연하기 위해 방한했다.

2014년까지 3년간 연 매출이 줄었던 구찌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자사 직원 중 밀레니얼세대를 대상으로 “어떤 옷을 입고 싶은가”를 물었다. 그 결과를 적극 수용해 ‘스트리트 감성’을 가미한 신제품을 내놨고 구찌는 최근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매출의 절반 이상이 35세 미만 고객들에게서 나온다. 최 디렉터는 “기업 입장에선 밀레니얼세대의 문화와 기호에 편견을 갖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 생존 전략”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밀레니얼세대의 특징 중 하나로 윤리적 소비를 들었다. 이준영 상명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미국의 신발 브랜드 ‘올버즈(Allbirds)’의 성공을 예로 들며 “밀레니얼세대는 이전의 어떤 세대보다 윤리적 소비에 대한 민감도가 높다”고 설명했다. 2014년 창업한 올버즈는 2년 만에 100만 켤레의 신발을 팔았다. 깔창을 고무가 아닌 사탕수수에서 나온 재료로 하는 등 친환경을 강조하는 게 특징이다.

기성세대보다 개성을 중시하는 이들의 지갑을 열게 하려면 맞춤형 마케팅을 강화해야 한다는 조언도 있다. 최명화 서강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기존 마케팅은 제품군을 단순히 가격에 따라 고급, 중급 등으로 나누면 됐지만 밀레니얼세대에게 이러한 마케팅은 별로 효과가 없다”며 “밀레니얼세대는 자신이 중시하는 가치나 특징이 있으면 브랜드나 가격을 따지지 않고 구매한다”고 했다.

이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많이 한다고 알려졌지만 SNS를 하지 않는 더 많은 밀레니얼세대가 있다는 것에도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최정규 디렉터는 “이들의 세세한 욕구를 파악하기 위해선 SNS 말고도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훨씬 세분화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황성호기자 hsh0330@donga.com
손가인기자 ga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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