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예산권 놓고 ‘이상한 줄다리기’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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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재부 “과기부에 연구개발 예산권 넘길 것”… 野 “왜 권리 포기하나”

#1. 23일 오전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경제재정소위 회의실. 고형권 기획재정부 1차관은 국회의원들에게 “연구개발(R&D) 예산 편성 권한 일부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 넘겨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러자 야당 의원들은 “선수가 스스로 심판을 하는 게 말이 되냐”며 우려를 표했다. “기재부 때문에 R&D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냐”는 말까지 나왔다. 결국 2시간에 걸친 회의는 결론 없이 끝났다.

#2. 기재부의 한 고위 당국자는 28일 점심을 거르면서 A 의원 사무실을 찾았다. R&D 예산 권한 이관을 반대하는 의원이었다. 이 당국자는 R&D 예산에 대한 기재부 의견을 재차 설명했지만 “법의 근간까지 흔들면서 기재부가 예산권을 놓으려 하는 저의가 뭐냐”는 말만 듣고 자리를 떠야 했다.

R&D 예산을 편성하는 권한을 놓고 정부·여당과 야당이 ‘이상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기재부는 “예산 편성권 일부를 포기하게 해 달라”고 읍소하고, 야당은 “권한을 쥐고 있으라”며 제안을 거절하고 있다. 예산 편성권은 ‘행정부가 발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권한’ ‘입법부와 사법부가 유일하게 을(乙)이 되는 권한’으로 불릴 정도로 힘이 막강해 이런 논의의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부는 기재부의 R&D 예산 편성 권한을 과기정통부로 일부 넘기기로 의견을 모았다. 500억 원 이상의 R&D 예산 예비타당성 조사 권한을 과기정통부로 위탁하는 것이 내용이다. 기재부가 정하던 총액 예산 한도 설정도 R&D 예산에 한해 과기정통부와 협의해 결정하기로 했다. 복지, 국방, 사회간접자본(SOC) 등 다른 분야는 기재부가 정해 해당 부처에 통보한다.

올 6월 국회에서 이 논의가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기재부는 예산 권한 이관에 강하게 반대했다. ‘경제성 평가를 간과할 수 있다’ ‘예산은 예산 전문가가 결정해야 한다’는 게 기재부의 생각이었다. 나랏돈을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선 예비타당성 조사, 심의 등을 철저히 해야 하는데 어떻게 집행 부처에 맡길 수 있냐는 논리였다.

하지만 “R&D 예산권을 과기정통부에 이관하는 건 문재인 대통령의 정책공약”이라는 여당의 압박을 무시할 순 없었다. 청와대와 국무조정실도 예산권 일부 이관에 힘을 실어줬다. 결국 기재부는 손을 들었다. 다만 기재부 내부에서는 “예산권을 함부로 줘도 되느냐”는 말이 여전히 나오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예산권을 조정하자’고 국회를 설득하는 기재부의 강도나 적극성이 내년도 예산안이나 세법 개정안 같은 다른 정부법안에 비해 약하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온다. 대통령 공약에 떠밀리듯 예산권 일부를 내려놓긴 하지만 여전히 탐탁지 않다는 것이다.

정부 내 교통정리는 마무리됐지만 실제로 R&D 예산권 일부가 과기정통부로 넘어갈지는 불투명하다. 야당의 반대 목소리가 크기 때문이다. 기재위 자유한국당 간사인 추경호 의원은 “예타 권한 위탁과 R&D 예산총액 한도 설정 권한을 모두 기재부가 그대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재위 국민의당 간사인 김성식 의원은 “지침을 명확히 한다면 예타 권한 위탁은 일부 할 수 있겠지만 예산지출 한도 설정 권한까지 과기정통부에 넘기는 건 안 된다”고 지적한다. 양측은 모두 예산 총액을 집행부처가 정하면 성과 관리가 힘들고 재정건전성이 우려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일각에서는 R&D 예산 권한을 어느 부처에 줄지에 대한 논의에 앞서 막대한 R&D 예산을 투입하고도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하는 근본 원인을 따지고 문제점을 개선하는 게 우선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선진국처럼 R&D 예산 집행에 대한 조사, 분석, 평가, 감독 등 제도적 장치에 전문가 참여율을 높이고 일선 연구자들이 연구 대신 행정에 매달리는 실태를 먼저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진영곤 중앙대 경제경영대 교수는 “재정건전성 관리를 위해 국가재정 관리 권한은 가급적 분산하지 않는 게 좋다”며 “예산 편성에 전문가들을 효율적으로 참여시킬 수 있도록 예산편성지침을 개정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제도적으로 반영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게 먼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종=김준일 기자 ji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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