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이 한줄]첫사랑 같은 골목길… 동네마다 한곳쯤은 남아있기를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7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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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골목은 지금 즐겨야 돼요. 조금 지나면 곧 유명해질 테니까요. ―밤의 인문학(밥장·앨리스·2013년)

쌀쌀한 공기가 남아 있는 이른 봄이었다. 퇴근 후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근처의 전 파는 술집을 찾았다. 10여 분을 기다린 뒤에야 겨우 빈자리가 났다. 막걸리를 시키는데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여기도 이제 손님이 많아서 늦으면 자리가 없어.” 이곳에서 종종 마주치는 A였다.

대화를 나누던 중 A는 “좋은 곳으로 안내할 테니 2차를 하러 가자”고 권했다. 그를 따라간 곳은 익선동. 골목에 들어서니 수제맥줏집을 비롯해 카페, 일본식 선술집 등이 띄엄띄엄 자리 잡고 있었다. 다들 어디선가 본 듯 친숙하면서도 새로운 분위기였다.

그중 한 일본식 선술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테이블 서너 개가 고작인 작은 술집이었다. 미지근하게 데운 일본식 청주(사케)를 마시는데 A가 말했다. “이 동네는 기사가 안 나왔으면 좋겠어. 이 좋은 동네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면 괜히 슬퍼질 것 같아.”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문득 예전에 자주 찾던 동네들이 떠올랐다. 정독도서관에 갈 때면 거닐던 삼청동 골목, 햄버그스테이크를 먹으러 들르곤 했던 경리단길까지. 그러고 보니 이 동네들, 유명해진 뒤로는 좀처럼 발걸음이 닿지 않는다. 예전에 느꼈던 편안함과 호젓함은 온데간데없고 프랜차이즈 간판들이 즐비한 데 아쉬움을 느끼면서부터다.

‘밤의 인문학’을 쓴 일러스트레이터 밥장도 어쩌면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다. 본래 이 책은 그가 맥주에 취해 읽은 책과 그동안 나눈 삶에 대해 정리한 이야기이다. 외로움, 연애와 사랑, 취미, 여행, 인간관계 등 그가 다룬 모든 소재가 흥미롭지만 특히 눈길이 갔던 분야는 카페. 책에 등장하는 강영민 작가는 밥장과 상수역 근처 ‘그문화다방’에서 맥주를 홀짝거리다가 이런 말을 건넨다.

“이름이 나면 사람들이 많이 찾겠죠. 사람이 많아지면 집세가 올라가고 작은 가게들은 하나둘씩 밀려나겠죠. 그러다 보면 여느 홍대 골목과 다를 바 없어지겠죠.”

좋은 곳을 더 많은 사람들과 즐기고픈 순수한 마음은 외려 그 좋은 곳을 사라지게 만드는 걸까. 10, 20년이 지나도 언제든 반겨주는 작은 카페들이 그 자리에 있었으면 한다.

박창규 기자 kyu@donga.com
#첫사랑#밤의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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