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현진]이세돌이 기계에 돌을 던진 날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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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진 산업부장
박현진 산업부장
이세돌 9단이 구글의 인공지능(AI) 프로그램인 알파고와의 첫 대국에서 돌을 던졌다. 그 순간의 감정을 묘사하기가 쉽지 않다. 기계와 컴퓨터가 인간을 점차 대신하고 있지만 얼마 남지 않은 자존심까지 허물어진 듯한 허탈함이랄까. 알파고가 프로 바둑 기사를 꺾은 것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10월 바둑 유럽챔피언인 판후이 2단을 꺾었지만 이 9단은 격이 다른 상대였다. 신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입신(入神)으로 불리는 세계 최정상급 기사다. 그는 대국에 앞서 “바둑의 낭만과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지켜내겠다”고 말했다. 이 약속을 응원했던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을 것이다.

이 9단이 패배를 인정한 순간 오버랩된 것은 에릭 슈밋 알파벳(구글 지주회사) 회장의 미소였다. 알파고가 판후이를 격파한 후 AI 전문가들은 “알파고가 다시 프로 기사를 이기려면 10년은 기다려야 할 것이다”고 예상했다. 구글은 이를 비웃기나 하듯 불과 5개월 만에 세계 최고의 기사를 잡았다. 구글은 상금으로 내건 11억 원을 포함해 이번 이벤트에 20억 원 정도를 쓴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홍보 효과만 1000억 원을 훌쩍 넘어설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무엇보다 10년 뒤면 시장 규모가 수백조 원에 이를 것으로 관측되는 AI 분야에서 구글이 앞서가고 있음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알파고가 이 9단과 대국을 벌이던 9일 IBM은 한국 등 해외 기자를 미국 뉴욕 왓슨연구소로 초대해 설명회를 가졌다. IBM의 AI 기술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구글에 알파고가 있다면 IBM에는 왓슨이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페이스북 등 글로벌 공룡기업들도 패권을 잡기 위해 이미 출사표를 던졌다.

이를 두고 4차 산업혁명을 언급하는 전문가가 많다.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간 1, 2차 산업혁명과 제러미 리프킨이 저서 ‘3차 산업혁명’에서 언급한 인터넷혁명 이후 또 한 번 충격파가 임박했다는 분석이다. 그 중심에는 AI, 가상현실(VR), 제조업에 정보통신기술(ICT)을 입힌 ICT융합기술 등 지능정보화 기술이 자리 잡고 있다. 산업혁명으로까지 명명할 수 있는 본질적 변화일지, 스쳐갈 유행일지 판단을 내리기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이런 산업계의 신조류가 등장할 때마다 한 컨설턴트가 들려준 얘기가 머리를 맴돈다. 철도와 자동차가 등장하던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 당시 가장 앞선 대중교통 수단이었던 마차 주들은 산업혁명으로 등장한 신기술에 어떻게 대응할지 고민했다. 이들은 거대한 산업화의 흐름에 동참하기보다는 말이 더 빨리 달릴 수 있도록 채찍을 더 잘 만드는 일에 집중했다고 한다. 결과는 쓸쓸한 퇴장이었다.

최근 동아일보와 e메일 인터뷰를 가진 AI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토마소 포조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는 삼성 LG 등 한국의 대기업들이 이 분야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간판기업들은 여전히 본격적인 투자를 저울질하고 있는 듯하다. 상업화와 수익성에 대한 신중함도 필요하지만 처음 발을 내딛는 시기에 비할 바 아니다. 미국이 AI 기술에 3조 원을 투자하는 동안 한국은 1000억 원에 그쳤다.

호흡도 표정도 감정도 느낄 수 없는 기계를 마주하고 바둑을 둔다는 것이 가장 낯설었을 이 9단. 비록 첫 대국에 패배했지만 한국 사회와 산업계에 많은 시사점을 던졌다. 그는 대국이 끝난 후 “(알파고) 개발진에게 존경심을 표한다”고 했다. 이를 바라본 국내 기업들과 정부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박현진 산업부장 witness@donga.com
#이세돌#알파고#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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