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외교 칼바람에… 에너지 자립 기반마저 ‘휘청’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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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미래사업이 정쟁거리로 전락… 관련예산 삭감돼 사실상 개점휴업
민간기업도 투자 축소-포기 잇달아… 전문가 “에너지 확보전 도태 우려”

13일 아랍에미리트(UAE)에서는 한국 자원외교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중요한 계약이 체결됐다. GS에너지·한국석유공사 컨소시엄이 현지 최대 육상유전에 3%의 지분을 투자키로 하고 향후 40년간 8억 배럴의 원유를 확보한 것이다.

지난해 한국 전체 원유도입량(9억2000만 배럴)과 맞먹는 물량을 따낸 초대형 계약이었지만 정부와 석유업계의 분위기는 밝지 않았다. 정유업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 수년간 정치적 이유로 자원외교가 백안시되면서 해외 자원개발을 위한 신규 사업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며 “이 정도로 큰 계약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 있다”라고 우려했다.

국회의 자원외교 국정조사가 흐지부지 막을 내리며 국민들 기억에서 잊혀져 가고 있지만, 자원개발의 최전선에서 뛰고 있는 정부와 업계에 남긴 상처는 깊다. 자원외교가 정쟁거리가 되면서 관련 예산은 ‘삭감 1순위’로 전락하고, 민간업체들도 잇달아 사업을 축소하거나 포기하는 등 해외 자원개발 자체가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향후 국제유가 움직임 등에 따른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져 작은 위기에도 흔들리는 취약한 구조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 자원개발 예산 ‘일단 깎고 보자’

자원외교 국조에 따른 해외 자원개발 사업 축소는 정부의 예산 배정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정부 유전개발 출자 예산은 올해 570억 원으로 2010년 1조2556억 원의 4.5%에 불과하다. 600억 원에 달했던 셰일가스 개발사업 예산이 국회 심의 과정에서 전액 삭감되면서 신규 사업 추진은 사실상 전면 중단됐다. 해외 자원개발 전체 예산도 지난해 6391억 원에서 올해 3594억 원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내년 예산은 올해보다도 더 쪼그라들 것으로 보인다. 기획재정부가 이미 해외 자원개발을 대표적인 구조조정 대상 사업으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기재부 측은 한국석유공사 등 공공기관을 앞세워 사업 주주로 참여하는 ‘출자 방식’과 돈을 빌려주는 ‘융자 방식’의 예산을 모두 올해보다 줄이기로 내부 방침을 정했다.

민간 기업들은 정부보다 더 움츠러들고 있다. 지난 정부 시절 자원개발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포스코와 경남기업 등이 대대적인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자원 분야가 ‘섣불리 손대면 안 될 분야’로 낙인찍힌 탓이다. 실제로 2011년 34건에 달했던 민간 기업의 석유·가스 해외 자원개발 투자 건수는 2013년 4건, 지난해 5건 등으로 크게 축소됐다. 현대자동차, 대우조선해양, 삼천리, STX 등은 해외자원개발협회 회원사에서 탈퇴한 상태다. 증권가 안팎에서는 대우인터내셔널이 자원개발 부문을 분사, 매각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여기에 특혜 논란이 거셌던 정부의 ‘성공불융자’ 예산도 2011년 2217억 원에서 지난해 1137억 원으로 절반 가까이 줄어 ‘실탄’도 부족한 상태다. 에너지 업체 관계자는 “해외 자원개발 사업은 보통 공기업과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위험을 분산했는데, 정부가 에너지 사업에 손을 놔 버리면서 투자를 늘리기 어렵게 됐다”고 말했다.

○ ‘에너지 자립 인프라 붕괴’ 우려 확산


한국과 달리 해외 주요 국가들은 해외 자원 확보를 ‘국가 안보’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중국은 2013년 이후 러시아,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등에 610억 달러(약 67조4355억 원)어치에 해당하는 송유관, 발전소, 철도 등을 건설해주는 대가로 원유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뒀다. 또 스위스 석유개발 회사인 아닥스사(93억 달러)와 캐나다 석유기업 넥센사(151억 달러) 등을 인수하는 등 공격적인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일본은 2004년부터 10년간 정부가 45개 석유개발 프로젝트에 3600억 엔(3조2350억 원)을 출자했다. 13일 GS에너지·석유공사가 지분 3%를 얻은 UAE 생산광구 국제입찰에서 일본 자원개발업체 인펙스는 한국보다 많은 5%를 확보했다.

전문가들은 지금 상태가 지속되면 한국이 세계 에너지 확보전에서 도태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에너지 관련 국제기구인 세계에너지협의회(WEC)는 지난해 ‘에너지 지속성 지수 보고서’에서 한국의 에너지 안보 순위를 회원국 127개국 중 103위로 매겼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97%에 달함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공급을 해외 메이저 업체들에 의존하고 있어 국제유가 변동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박창협 강원대 교수(자원공학)는 “석유와 가스의 안정적 확보는 대부분의 에너지 자원을 수입하는 한국 현실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며 “지금부터라도 자원의 안정적 조달과 일정 수준의 수익 확보를 위해 장기적 투자 계획과 특성화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훈 기자 january@donga.com
#자원외교#에너지#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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