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주력 상품, 줄줄이 ‘치킨게임’ 시작됐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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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가 3분기(7∼9월)에 사상 처음으로 영업이익 10조 원을 넘었다는 잠정 실적을 4일 발표했다. 지난해 10월 0.83달러까지 떨어졌던 2GB(기가바이트) D램 가격이 지난달 말 기준 1.72달러로 2배 이상으로 오르면서 수익성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 SK하이닉스도 3분기에 좋은 실적을 거둔 것으로 관련 업계는 추정하고 있다. 한때 세계 반도체시장 1, 2위를 다투던 NEC, 히타치 등 일본 기업이 공급 경쟁에서 밀려나면서 ‘살아남은 자들의 잔치’가 시작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면 국내 기업들의 태양광 사업은 사정이 다르다. 정부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 기업들의 물량공세를 버텨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의욕적으로 태양광 사업에 투자한 웅진그룹은 그룹 해체라는 상황을 맞았다. OCI도 태양광용 폴리실리콘 사업부문에서 1분기(1∼3월)부터 3분기까지 연속 적자가 예상된다. 한국실리콘도 폴리실리콘 공장 가동을 중단한 상태다.

시장 주도권을 거머쥐기 위해 ‘다걸기’ 하는 ‘치킨게임(Game of chicken)’이 제조업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국내 대표 산업이 줄줄이 영향을 받고 있다. 철강과 스마트폰,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글로벌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한국의 대표 제품들이 수요 감소와 공급 과잉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다.

출혈경쟁을 이겨낸 승자에게는 고수익 기반을 쌓을 수 있는 시장 주도권이 주어진다. 반면 패자는 막대한 설비 투자가 고스란히 부담으로 남아 헤어나기 힘든 수렁에 빠지게 된다. 치킨게임 국면에 접어들고 있는 철강과 디스플레이, 스마트폰 업계는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 중국이 촉발한 철강 공급 과잉


반도체와 태양광에 이어 최근 치킨게임의 중심에 선 것은 철강업계다. 5월 모건스탠리가 내놓은 세계 철강 공급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철강업계의 공급 과잉(공급량―소비량) 규모는 연간 3억3400만 t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공급 과잉을 주도하는 국가는 중국. 시장 수요 대비 초과 물량이 2억 t(전 세계 과잉물량의 59.8%)이다. 한국도 과잉 물량이 연간 500만 t인 것으로 조사됐다. 모건스탠리는 “최근 철강산업 부진은 경기 변동뿐만 아니라 설비 과잉이 한몫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공급 과잉으로 철강업체들의 수익성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생산량 기준으로 세계 최대 다국적 철강회사인 아르셀로미탈의 지난해 영업이익률은 2.56%였다. 2011년(5.9%)과 비교하면 반 토막이 났다. 룩셈부르크 아르셀로와 인도 미탈이 합병한 아르셀로미탈은 합병 첫해인 2006년(13.7%)부터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전인 2008년(11.5%)까지 두 자릿수 영업이익률을 냈다. 세계 5위인 포스코도 지난해 영업이익률이 7.8%로 1968년 창사 이후 처음으로 영업이익률이 한 자릿수대로 떨어졌다.

시장이 위축되고 있지만 국내 철강사들은 방어 대신 공격 자세를 취하고 있다. 최근까지 고품질 자동차강판 생산에 주력해 온 포스코는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에너지강재 분야 육성에 나섰다. 에너지강재는 석유, 가스 등 에너지원의 생산과 수송, 저장설비에 사용되는 강재다. 포스코는 2020년까지 이 분야에서만 연간 800만 t의 생산능력을 갖춰 세계 시장의 16%를 차지하겠다는 것이 목표다.

현대제철은 지난달 충남 당진제철소에 제3고로를 준공했다. 이 고로가 연말부터 본격 가동되면 현대제철은 연간 2400만 t의 조강 생산 능력을 갖춰 세계 11위 철강사가 된다.

○ 스마트폰과 디스플레이도 적자생존 국면


정보기술(IT) 업계에서는 스마트폰 제조사들의 치킨게임이 한창이다. 삼성전자 ‘갤럭시’와 애플 ‘아이폰’이 주도한 선진국 위주의 ‘혁신게임’ 양상에서 신흥국의 스마트폰 확산을 계기로 ‘규모의 경제’ 대결에 들어섰다. 양자 구도 속에서 중국 레노버, 화웨이 등이 물량 공세를 벌이고 있다.

IT업계에서는 ‘혁신게임’의 패자인 노키아와 블랙베리가 밀려난 데 이어 대만 HTC, 미국 모토로라 등이 치킨게임의 희생자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 삼성-애플 스마트폰 전쟁에 中업체 물량공세 추격 ▼

노근창 HMC투자증권 연구원은 “스마트폰 시장은 2년 이상 적자가 나면 생존이 어렵다”면서 “최근 하드웨어 경쟁력이 상향 평준화된 만큼 생존을 위해서는 마케팅과 원가절감 능력이 중시된다”고 설명했다.

디스플레이 시장도 치킨게임에 돌입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상범 LG디스플레이 사장은 1일 기자들과 만나 “내년 디스플레이 시장에 공급 과잉이 오는 건 분명하다”면서 “기존 투자계획은 일정대로 진행하겠지만 상황에 맞춰 속도를 유연하게 조절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는 내년 완공을 목표로 중국에 8세대 액정표시장치(LCD) 공장을 짓고 있다. 여기에 중국 업체인 BOE(京東方·징둥팡), 차이나스타 등도 내년부터 8세대 LCD 라인을 가동할 계획이라고 밝혀 본격적인 LCD 공급 과잉 현상이 일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 정부는 자국 LCD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정책들을 내놓고 있다. 2015년까지 중국 TV시장의 80% 이상을 현지 업체로부터 조달한다는 목표다. 중국은 지난해 4월 LCD 패널의 수입관세에 적용하던 잠정수입세율을 기존 3%에서 5%로 상향 조정했다. 국내 디스플레이업체들은 곡면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등 차세대 기술로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임태윤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IT 분야에서 벌어지는 치킨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장 수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한편 선행투자와 연구개발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 치킨게임(Game of chicken) ::


원 래 국제정치학에서 사용되던 게임이론의 하나로 어느 한쪽이 양보하지 않을 경우 양쪽이 모두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극단적인 상황을 뜻한다. ‘겁쟁이(치킨) 게임’으로도 불리는 이 게임은 1950년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한 것으로 한밤중에 도로 양쪽에서 두 명의 경쟁자가 각자 차를 몰고 정면으로 돌진하다가 먼저 운전대를 꺾는 사람이 지는 경기다.

이진석·정지영 기자 gene@donga.com
#제조업#치킨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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