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부모들 “아들아, 내 한몸 챙기기도 바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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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시대가 가져온 신풍속 ‘부모의 경제 독립선언’

숙명여대 4학년에 재학 중인 박미영(가명·26) 씨는 최근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아버지가 “내 재산은 모두 노후를 위해 쓸 계획”이라고 공언했기 때문이다. 교육업체 창업을 꿈꾸던 박 씨가 기대했던 사업 밑천이 날아가 버린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내 삶이 바로 서야 자식도 행복한 법”이라며 “시대가 변했다”고 선을 그었다.

6억5000만 원대 집을 담보로 1년 넘게 주택연금을 받고 있는 최모 씨(66)도 30년 공무원 생활을 마감하며 ‘나를 위한 삶을 살자’고 다짐했다. 그는 “노후를 즐기고 싶어 집을 자식에게 안 주고 각종 연금을 받아 살 생각”이라며 “내 재산은 내 노력에 대한 대가”라고 말했다.

주택, 금융자산 등을 유산으로 물려주지 않고 평생재산으로 삼는 부모들이 늘고 있다. ‘자녀로부터 독립’을 외치는 부모가 늘면서 자식에게 다 내주는 ‘가시고기 부모’는 옛말이 돼 버렸다.

○ 상속·증여세는 줄고, 유산분쟁은 늘어

유산을 물려주는 부모가 줄다 보니 관련 세금인 상속세와 증여세도 감소했다. 국세청이 최근 새누리당 이재영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들어 5월까지 걷힌 상속·증여세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3% 적었다.

유산을 둘러싼 소송 건수도 늘어나고 있다. 대법원에 따르면 유류분(遺留分·상속인을 위해 법률상 유보된 상속재산) 관련 소송은 2002년 69건에 불과했지만 10년 만에 589건으로 8배 이상으로 뛰었다. 강신업 법무법인 하나 변호사는 “재산을 평생 갖고 있으려는 부모들이 많아지다 보니 부모 사망 뒤 자녀 간 소송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식 중 일부는 노부모가 아프거나 의사결정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때 편법으로 재산을 더 많이 물려받기 때문이라는 것.

재산에 집착하는 자녀도 있지만 요즘 20, 30대들은 ‘부모의 경제 독립선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취업준비생 임모 씨(29)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부모님이 ‘이제 성인이니 각자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하셔서 주식, 펀드에 꾸준히 투자했다”며 “3년 안에 내 집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대기업 대리로 일하는 정모 씨(32)는 “대학 때부터 돈을 모아 한 달 전 4억 원대 아파트를 분양받았다”며 “퇴직하신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려 했더니 ‘너는 네 삶을 살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쿨’해진 부모 자식 관계를 반영한 산업계 변화도 눈에 띈다. 요즘 50, 60대 부모는 자녀의 아파트를 방문해도 자녀의 집이 아닌 아파트 단지 내 손님용 숙소 ‘게스트 하우스’에 묵는 경우가 많다. 자녀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것. 건설업계에서는 최근 아파트 단지 내 게스트 하우스를 늘리는 추세다.

○ 고령화, 저성장 시대의 풍경

전문가들은 유산 없는 가족이 느는 건 100세 시대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본다. 부모가 오래 살다 보니 자녀에게 기대서만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창선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은퇴 뒤의 삶이 길어지니 부모들은 자식보다 자신의 노후를 중시하게 됐다”며 “앞으로 집을 물려주기보다 집을 담보로 연금을 받는 역모기지론 가입자가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자녀수가 줄어든 점도 영향을 미쳤다. 자녀가 많으면 성공한 2세 덕을 볼 확률이 높지만 자녀수가 적으면 자녀의 성공만 바라보기엔 리스크가 크다. 강창희 미래와금융연구포럼 대표는 “100세 시대에는 부모, 자녀 관계를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며 “일찍이 연금으로 최저생활비를 마련하고 부동산과 금융자산 비율을 적절히 조절해 쌓아둬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권승록 인턴 기자 서강대 경영학과 졸업
#100세 시대#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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