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제작 유혹에도 꿋꿋이 한우물… “우리가 K패션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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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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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리안스타일’로 패션한류 이끄는 한국 장인들

《 최근 한국의 패션, 이른바 K패션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면서 실제로 이들 제품을 만드는 장인(匠人)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 디자이너의 독특한 창의력을 꼼꼼한 품질로 제품화할 장인이 없다면 K패션의 인기는 불가능하다. 전문가들은 디자이너의 창의력과 장인의 손재주에 기업의 투자까지 삼박자가 맞아야 명품이 탄생한다고 말한다.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가방이나 구두를 만드는 곳은 ‘공장’으로, 기술자는 ‘공장장’으로 부르며 스스로 폄하해 왔다. 한국의 장인들은 뛰어난 기술이 있어도 이 공장 저 공장을 떠돌며 해외 명품의 ‘짝퉁’을 제작해 달라는 유혹을 받기도 했다. 중국산 저가제품 공세에 생활고를 겪기도 했다. 이에 비해 에르메스 루이뷔통 구치 등 해외 명품 브랜드는 일찍부터 자사 제품이 명품인 이유를 장인에서 찾았다. 가방이나 신발을 만들거나 자수를 놓는 곳을 ‘공방’이나 ‘아틀리에’로 부르고, 오랫동안 이 일을 한 사람들은 최고의 대우를 하며 마케팅에 활용한다. 제품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해외 명품은 제품이 비싸도 소비자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명품에 대한 브랜드 프리미엄이 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장인 육성 비용까지 제품 가격에 포함시킬 수 있었다. 국내에선 최근까지도 비싼 가격을 주고 소비자가 기꺼이 구입할 만한 명품이 없었다. 이 때문에 기업들도 장인을 제대로 대우할 엄두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한류 등으로 한국산 패션 브랜드들이 프리미엄 효과를 누리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바뀌고 있다. 정년퇴직 연령을 훌쩍 넘어도 실력만 있으면 삼고초려를 해서라도 장인을 모셔 오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자부심을 갖고 묵묵히 평생 한 길만 걸어온 한국의 패션 장인들을 소개한다. 》
동아일보가 만난 4명의 K패션 대표 장인은 디자이너의 ‘불가능한’ 요구를 들었을 때 설렌다고 입을 모았다. 짧게는 17년, 길게는 42년 동안 한 가지 일만 해오며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명품’을 남기고 싶다는 게 이들의 꿈이기 때문이다.

○ 컬렉션 의상…예순 넘어도 대기업에 스카우트

임치준 씨가 패턴(옷본)을 만든 ‘준지’의 2013년 봄여름 파리 컬렉션. 제일모직 준지 제공
임치준 씨가 패턴(옷본)을 만든 ‘준지’의 2013년 봄여름 파리 컬렉션. 제일모직 준지 제공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42년차 패턴사 임치준 씨(66)의 작업 공간에는 노란 도화지가 빽빽이 옷걸이에 걸려 있다. 디자이너의 스케치를 실제 옷으로 만들기 위해 각 부분의 치수를 적어놓은 옷본(설계도)이다.

“압구정동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던 2002년 유별나게 큰 트렌치코트 패턴을 만들어 달라는 희한한 주문을 받았어요. 그런 건 해본 적이 없었지만 신이 나더라고요.”

그 주문을 한 사람은 인기 디자이너 정욱준 씨다. 당시 30대의 젊은 디자이너와 50대의 노련한 패턴사는 새로운 옷을 제대로 만들고 싶다는 열정에서 서로 통했다.

임 씨는 “명동 맞춤복 시대가 지나가고 기성복 시대가 오면서 늘 비슷한 패턴만 만들게 되어 머리를 쓸 일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2007년 정욱준 디자이너가 ‘준지(JUUN.J)’라는 브랜드로 파리 컬렉션에 나가자 임 씨에게 ‘머리 쓸 일’이 많아졌다. 재킷의 깃과 사이즈 등 어느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 디자이너가 스케치를 보내면 그가 뭘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연구해 각 부분의 치수를 정하고, 옷본을 만든다. 한 벌에 최소 16시간이 걸린다. 매년 두 번 있는 파리 컬렉션 무렵엔 새벽 퇴근이 기본이다.

임 씨는 지난해부터 ‘수석보’라는 직책이 생겼다. 제일모직이 정 디자이너를 상무로 영입하면서 함께 입사했다. 제일모직 정년퇴직 연령 만 55세보다 열 살이나 많았지만 정 디자이너의 패턴을 만들 사람은 그뿐이었다.

그의 남은 꿈은 준지가 세계적인 명품이 되는 날을 보는 것이다. 가능성도 있다. 프랑스 ‘르피가로’지가 정욱준을 주목받는 디자이너로 꼽았고, 샤넬과 펜디의 디자이너 카를 라거펠트가 준지 옷을 입고 펜디 패션쇼의 피날레에 등장해 이슈가 됐다.

임 씨는 “내 손을 거친 옷이 파리에 서는 것을 보면 짜릿하다”며 “나이가 많다는 편견을 깨고 준지를 한국의 샤넬 같은 브랜드로 키우는 데 한몫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 2대로 이어지는 송정동 ‘무두장이’

19일 서울 성동구 송정동 퍼지컬렉션에서 한 구두 장인이 ‘슈콤마보니’ 구두를 제작하고 있다. 가죽을 다듬는 재갑, 구두의 구조를 설계하는 패턴, 겉가죽을 만드는 갑피, 구두 형태를 완성하는 저부, 검사 등 5단계를 거쳐 구두 한 켤레가 만들어지기까지 5시간이 넘게 걸린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19일 서울 성동구 송정동 퍼지컬렉션에서 한 구두 장인이 ‘슈콤마보니’ 구두를 제작하고 있다. 가죽을 다듬는 재갑, 구두의 구조를 설계하는 패턴, 겉가죽을 만드는 갑피, 구두 형태를 완성하는 저부, 검사 등 5단계를 거쳐 구두 한 켤레가 만들어지기까지 5시간이 넘게 걸린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서울 성동구 송정동의 ‘퍼지컬렉션’ 공장. 가죽 냄새가 풍기는 가운데 8명이 ‘슈콤마보니’ 구두를 만들고 있었다. 슈콤마보니는 청담동 구두 디자이너 1세대로 평가받는 이보현 디자이너가 2003년 내놓은 브랜드다. 홍콩, 일본, 프랑스 등 20개국에 진출하며 지난해 122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슈콤마보니의 성공 뒤엔 42년차 구두 패턴사인 표성진 퍼지컬렉션 사장(61)이 있다. 그는 디자이너의 스케치만 보고 구두 구조를 설계하는 ‘구두 건축가’다. 이보현 디자이너가 의류 브랜드에 신발을 납품하던 2001년부터 손잡아 12년째 함께 일하고 있다.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구두 일을 배운 표 사장은 1980년부터 자기 공장을 꾸렸다. 그는 “구두는 내 인생의 모든 것이다. 한때는 하늘만 봐도 구두가 왔다 갔다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성수동과 송정동에 밀집한 ‘수제화 타운’은 한국 구두산업의 메카로 꼽힌다. 1990년대 서울 퇴계로와 명동, 회현동에 밀집해 있던 수제화 장인들이 땅값이 싸고 지하철역과 가까운 성수역 인근에 모여들면서 생겼다. 하지만 250만 원 안팎의 월급과 열악한 근무환경 탓에 젊은이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다. 퍼지컬렉션도 2000년대 초 직원 수가 45명에 달했지만 지금은 18명으로 줄었다. 평균 연령도 50세가량이다.

그러나 표 사장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일을 이어 나가고 있다. 딸 표기화 씨(32)는 지난달 온라인 몰을 만들어 자신이 디자인한 구두 브랜드 ‘세이마네임’을 출시하기도 했다.

표 사장은 “눈이 보일 때까지 구두 일을 계속할 것”이라며 “나이 먹어서도 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축복”이라고 말했다.

○ 가방-짝퉁 유혹? 노, 고유한 명품 만들고 싶었다

17일 서울 강동구 길동 성원실업에서 만난 최군락 씨는 내피가 없어 가벼운 가죽 사각백의 형태를 만들기 위해 디자이너들과 석 달 이상 연구했다고 말했다. 최 씨가 그렇게 탄생한 ‘쿠론 스테파니 클래식’ 백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17일 서울 강동구 길동 성원실업에서 만난 최군락 씨는 내피가 없어 가벼운 가죽 사각백의 형태를 만들기 위해 디자이너들과 석 달 이상 연구했다고 말했다. 최 씨가 그렇게 탄생한 ‘쿠론 스테파니 클래식’ 백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40년 가방달인 최군락 씨(51)가 가방을 처음 만진 것은 11세 때였다. 8남매의 차남으로 여유가 없어 일찍부터 일을 시작해야 했다. 한창 놀고 싶은 나이라 공장이 싫을 만도 했지만 최 씨는 달랐다.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가방의 세계가 신기했다. 그의 손재주를 눈여겨본 공장 ‘스승님’이 최 씨를 자신의 집에 살게 하면서 고급 가방을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1970년대 중반 가죽 핸드백은 상류층만 들 수 있었기에 최 씨는 ‘가죽을 다룰 수 있는 기회’에 신이 났다.

하지만 1990년대 해외 명품이 들어오면서 한국 핸드백은 가격을 낮추는 데 급급했다. 최 씨는 “한국 핸드백이 비싸면 소비자가 외면했다”며 “이탈리아는 소를 잡고 45일 정도 가죽을 숙성해 만들지만 우리나라는 그렇게 했다간 채산성이 안 맞아 25일 된 가죽으로 만들었다. 좋은 가방을 만들 수 없는 분위기가 아쉬웠다”고 털어놓았다.

최 씨는 좋은 가방을 만들고 싶은 욕심에 1994년 일본 가방회사의 영입 제안을 받아들였다. 2002년 뇌출혈로 쓰러질 때까지 밤낮으로 일했다. 그는 “한 땀 한 땀 1mm 차이도 눈에 보이기 때문에 쉴 수가 없다”고 말했다. 건강 때문에 2010년 귀국한 뒤 성원실업 우성식 사장을 만났다. 한국에도 제대로 된 가방을 만들겠다는 브랜드가 생겼다며 우 사장이 최 씨를 3개월 설득하자 공장장으로 합류한 것이다. 그 브랜드가 바로 올 상반기 매출 신장률이 648%에 달하고, 최근 유럽시장에 진출해 호평을 받고 있는 ‘쿠론’이다.

최 씨는 “한국에 오래가는 브랜드가 없어서 손재주 많은 사람들이 ‘짝퉁’ 제작의 유혹에 빠지거나 그냥 동대문에서 장사를 한다”며 “쿠론의 디자이너들은 내피가 따로 없이 가죽 하나로만 만들어 무게를 줄여달라고 하는 등 어려운 주문을 해서 살맛이 난다”고 말했다.

○ 청바지-중국 저가, 유럽 프리미엄과 싸운다

창의적인 워싱으로 홍콩, 중국 상하이 등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버커루 청바지. 버커루 제공
창의적인 워싱으로 홍콩, 중국 상하이 등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버커루 청바지. 버커루 제공
17년 청바지 워싱 전문가 백석현 엠파이어진스 부장(39)은 청바지 워싱을 ‘손의 예술’이라고 믿는다. 얼마나 물을 뺄지, 주름 모양을 어떻게 만들지, 일부러 낡아 보이는 모양을 어떻게 만들어 낼지 손으로 직접 하기 때문이다. 백 부장은 “청바지 워싱은 요리와 같아 똑같은 재료로 누가 손맛을 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며 “창의성이 중요해 ‘연식’보다 ‘열정’이 중요한 분야”라고 소개했다.

백 부장은 주요 백화점 매출 톱3 브랜드에서 유일하게 남은 한국 브랜드로 현재 미국, 홍콩, 상하이에 진출하고 있는 청바지 ‘버커루’의 워싱 파트너다. 1995년 군 제대 후 워싱 공장을 하던 삼촌 회사에 들어간 게 청바지와의 첫 만남이었다.

하지만 청바지 공장은 시련이 끊이질 않았다. 제조를 맡긴 해외 브랜드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중국으로 떠나고, 2000년대에는 수십만 원이 넘는 해외 프리미엄 진과 저렴한 제조유통일괄형(SPA) 브랜드가 쏟아졌다.

하지만 백 부장은 한국형 고급 청바지에 대한 꿈이 있었다. 마침 2002년 동대문에서 시작해 TBJ 등을 내며 30년 동안 청바지를 팔아 온 MK트렌드에서 고급 브랜드 버커루를 만들고 싶다고 연락해 왔다.

백 부장은 버커루 고유의 새로운 워싱을 만들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자연스러운 주름을 만들까 고민하다 잠수복에 뼈대를 넣어 사람이 앉았다 일어날 때 생기는 주름의 위치와 모양을 연구하기도 했다.

백 부장은 “유럽 프리미엄 진과 싸워도 손색없는 한국 청바지가 해외에서 인정받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강유현 기자 yhkang@donga.com  
#K패션 명장#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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