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이진]저축은행 비리와 ‘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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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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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경제부 차장
이진 경제부 차장
“떼끼놈, 그것은 아무 귀청이나 터치라고 허가받은 베슬이 아니다! 종술이 느이 때나 느이들 자식 때나 내가 시종여일혀게 핵교서 가르치는 것은 완장을 차는 사람일시락 남보담도 더 많이 고지 먹은 소작인이니께 남보담도 더 피나게 농사지어서 추수 때는 반다시 빚을 갚아야 될 책임이 있다, 이런 것이니라!”

소설가 윤흥길의 대표작인 ‘완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날건달이나 다름없는 임종술은 저수지 감시원 완장을 찬 뒤 마치 큰 벼슬이나 얻은 듯 거드름을 부린다. 허가 없이 고기를 잡던 아이를 때려 고막을 터뜨리는 행패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다 16년 전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교사이자 현재 교장과 마주쳐 한바탕 훈시를 듣게 된다. 대학 때 읽은 뒤 잊고 지내던 이 소설을 다시 꺼내 뒤적거리니 이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 이유는 3차 저축은행 구조조정으로 퇴출된 저축은행 대주주 및 임원들을 보며 완장을 찬 임종술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임석 솔로몬저축은행 회장과 김찬경 미래저축은행 회장 등이 허세를 부리면서 수많은 예금자가 눈물을 흘렸다. 임석과 김찬경에게는 1억, 2억 원은 아이들 용돈정도밖에 되지 않는 푼돈이었다. 예금자들이 먹고 싶고, 입고 싶은 마음을 눌러가며 맡긴 돈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명색이 서민을 위한 저축은행이지만 대주주들의 행태는 귀족을 뺨쳤다. 영업정지된 저축은행 셔터의 쇠창살을 잡고 한숨을 쉬는 예금자들의 박탈감이 오죽 클까.

저축은행 대주주들이 귀족놀음을 한 데는 ‘지위의 인플레이션’이 큰 영향을 미쳤다. 2000년 김대중 정부는 상호신용금고라는 이름을 저축은행으로 바꾸는 내용의 법 개정에 나섰다. 국회에서는 저축은행이라는 이름이 시중은행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며 반대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당시 한 의원은 “나중에 피해가 생기면 장관, 차관은 나가버릴 텐데 누가 책임지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가 밀어붙여 상호저축은행이라는 절충안이 나왔고 2010년부터는 저축은행으로 쓰도록 법이 다시 바뀌었다.

우려했던 대로 예금자들은 은행장이라고 하면 저축은행장인지, 시중은행장인지를 가리기 힘들었다. 여기에 금융그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저축은행까지 나왔으니 시중은행을 축으로 하는 거대 금융그룹과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임종술처럼 저축은행 대주주가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기에 안성맞춤인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몇몇 저축은행 대주주와 임원들이 저지른 불법행위는 보도된 것만 해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개중에는 과장이나 오해도 더러 있을 테니 법원의 최종적인 판단을 기다릴 필요는 있다. 하지만 이들이 금융인이라면 가장 중요하게 인정받아야 할 ‘믿음’을 잃어버렸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심지어 한주저축은행에서는 ‘가짜 통장’을 내주고 예금자들의 돈을 가로챘으니 신뢰를 들먹이는 일이 사치스럽기까지 하다.

금융업은 어느 업종보다 신뢰가 중요하다. 고객들이 믿지 않으면 언제라도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이 일어날 수 있다. 한때의 바람을 타고 급성장했다고 해서 믿음과 책임까지 함께 커질 리는 만무하다. 최근 저축은행 사태는 ‘금융의 믿음’은 ‘완장의 힘’이 아니라 오랜 세월 한결같은 자세에서 나온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 반면교사였다.

이진 경제부 차장 leej@donga.com
#저축은행 비리#데스크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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