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산업 살아야 첨단산업 산다]<上>중소기업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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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4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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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 없고… 지원 없고… 신기술 개발 먼 얘기”

가볍고 얇은 휴대전화부터 거대한 컨테이너 선박까지 뿌리산업이 연관되지 않은 산업분
야는 없다. 그러나 국내 대부분의 뿌리산업 관련 기업은 아직도 영세성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14일 인천에 있는 한 도금 관련 중소기업의 작업장에서 자동차부품을 제작하는 모습. 인천=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가볍고 얇은 휴대전화부터 거대한 컨테이너 선박까지 뿌리산업이 연관되지 않은 산업분 야는 없다. 그러나 국내 대부분의 뿌리산업 관련 기업은 아직도 영세성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14일 인천에 있는 한 도금 관련 중소기업의 작업장에서 자동차부품을 제작하는 모습. 인천=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1.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플라스틱 페트(PET)병. 이 페트병 생산 기계를 만드는 데 어려운 기술이 필요할 것 같지 않지만, 국내 식·음료 업체들은 페트병 생산 기계를 수입하고 있다. 독일산이 90%, 일본산이 10% 정도다. 국내 기술로도 기계를 만들 수 있다는데 왜 수입하는 것일까.
박균명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뿌리산업추진단장은 “국내 기술로는 5초에 36개의 페트병을 생산하지만 외국 기계는 136개까지 가능하고, 원료의 양과 디자인 등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다”며 “원천기술은 있지만 이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이른바 ‘결정적 2%’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2%의 차이는 뿌리산업인 소성가공, 금형 등의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2. 애플의 ‘아이폰 3G’가 처음 출시됐을 때 소비자들은 열광하고, 경쟁회사들이 놀랐던 부분은 유려한 디자인을 뒷받침하는 매끈한 곡선 몸체였다. 김세종 중소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매끈한 아이폰의 뒷면은 고도화된 표면처리와 금형기술 덕분”이라며 “아무리 훌륭한 디자인이 있더라도 실제로 이를 제작할 수 있는 표면처리와 금형기술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다”고 설명했다. 》

이처럼 뿌리산업은 기초적인 소비재부터 높은 기술력과 고부가가치를 갖춘 전자제품에 이르기까지 필수적인 산업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산업이 첨단화해도 ‘더럽고, 힘들고, 위험하다’는 이유로 ‘3D 산업’이라 불렸던 뿌리산업의 환경은 그대로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병역특례, 유망 기업 자금 지원, 산업단지 조성 등 정부의 중소기업 지원정책이 정보기술(IT)과 생명공학기술(BT) 분야에 집중돼 뿌리산업은 다른 중소기업보다 더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 ‘언감생심’ 기술 개발

“자식에게 빚 물려주기 싫으니까 하는 거죠. 미래가 뻔한데…. 지금 일하는 직원들 실업자 만들 수 없어서 합니다.”

인천 남동구 남동공단에 위치한 일진도금단지. 아파트형 공장인 이곳에 입주한 대한금속 신규식 대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1984년 서울 청계천의 한 귀퉁이에서 회사를 창업한 그는 회사를 연 매출 50억 원 규모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그러나 그는 회사를 자식에게 물려줄 생각이 없다. 그의 말대로 “지금 기자가 쓰고 있는 안경도, 손에 쥐고 있는 볼펜도, 주머니에 있는 휴대전화도 표면처리 없이는 제품을 팔 수 없는” 중요한 산업이지만 정부의 지원은 전무하고, 기업을 둘러싼 환경은 더욱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수익성의 문제. 뿌리산업은 제조업의 핵심이지만, 태생적으로 납품업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제조원가 절감’이라는 미명 아래 제대로 된 값을 받지 못하고 있다. 대한금속도 지난해 여름부터 매달 적자다.

생존을 고민하다보니 기술개발은 먼 이야기다. 신 대표는 “표면처리한 제품의 두께를 측정하는 측정기나 금속현미경 등은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하는 데 필수적인 설비”라며 “문제는 이 설비가 대당 수천만 원을 호가하기 때문에 선뜻 구입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대한금속과 이웃한 C금속 관계자는 “도금도 기술력만 갖추면 스마트폰 부품 등 고가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지만, 연매출 수억 원 수준에 이익은 거의 없기 때문에 기술개발에 투자할 여력이 없다”고 말했다.

따라서 표면처리를 얇게 해 부품의 두께를 줄이는 슬림화 기술, 특수약품으로 얇게 표면처리를 해 전도성을 높이는 전도성 향상 기술 등 ‘고급 기술’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 기술개발이 없으니 값싼 제품만을 생산하고, 생산량이 늘어나도 수익성은 제자리인 악순환의 쳇바퀴만 돌리고 있는 셈이다.

○ 젊은 직원 찾기 힘든 뿌리산업

이는 곧 인력 부족 및 고령화로 연결된다. 보수가 낮고 근무환경이 열악해 신규로 투입되는 인력이 없고, 따라서 대부분의 직원이 40대 이상인 현실은 뿌리산업의 고질적인 문제점이다.
▼ “직원들을 실업자 만들 순 없으니 할수 없이 가동”
도금공장 사장의 분노와 한숨

실제로 일진도금단지에 입주한 기업들은 직원들이 손으로 제품을 옮겨 도금액에 담근 뒤 바람으로 말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현장은 도금액이 뿜어내는 매캐한 연기로 가득했다. 물론 이 공정을 대신할 자동화설비가 있긴 하지만 비싸기 때문에 단지에 입주한 30개 기업 중 자동화 설비를 갖춘 곳은 채 5곳이 되지 않는다. 중기중앙회 관계자는 “1980, 90년대의 공장 환경이 지금도 그대로인 곳이 대부분인 탓에 외국인 근로자들조차 도금업체라면 안 간다고 손사래를 친다”고 말했다.

충청권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용접 및 소성가공 분야의 K기업은 직원 15명 중 10명이 40대 이상이다. 회사 관계자는 “뿌리산업 분야에서 20, 30대 젊은 남자가 일하고 있다면 그 직원은 백이면 백 공장주 아들일 것”이라며 “평생을 이 분야에서 일해 온 직원들만 그저 마지못해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월급이라도 높아야 신규 인력이 올 테지만, 간신히 적자를 면하는 상황에서 월급은 몇 년째 제자리걸음이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원자력발전소 건설 시 용접 두께를 0.5mm만 줄여도 원전 수명이 20년 가까이 늘어날 정도로 뿌리산업은 중요한 분야”라며 “정부가 기초적이고, 돈이 안 된다며 뿌리산업을 홀대하고 IT, BT 분야에만 지원을 집중한 부작용이 이제는 정말 극한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인천=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박승헌 기자 hparks@donga.com  
:: 뿌리산업 6대 분야 ::

주조: 금속을 녹여 형틀에 부어 일정한 형태를 가진 소재 및 부품을 만드는 공정.
용접: 금속재료에 열과 압력을 가해 접합하는 공정.
금형: 정밀부품의 대량생산을 위해 특정 형틀을 설계 및 가공하는 공정.
소성가공: 금속에 힘을 가하면 변형되는 성질을 이용해 가공 하는 방법.
열처리: 금속에 가열과 냉각을 반복해 더욱 단단하고 균질하도록 하는 공정.
표면처리(도금): 물리적·화학적·전기적 처리로 부식 방지, 표면 경화 등의 기능을 추가해 소재 및 부품을 마무리하는 공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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