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시장에서 일수업자가 사라진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8월 31일 17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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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도통 일수(日收) 아줌마들이 보이질 않네. 항상 저기에 앉아있었는데."

순대국집 아줌마의 설명이 없었더라면 수유시장에서 생긴 변화상을 알아내기 힘들 뻔 했다.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있는 전통시장인 수유시장. 코끝을 자극하는 건어물 상점,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순대국집 사이로 저녁거리 장보기를 나온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장면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시장 주변에 상주하던 일수업자 6명은 보이지 않았다.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더니 최근 들어서는 아예 볼 수가 없다.

재래시장만큼이나 역사가 긴 시장의 일수업자들이 사라지고 있다. 대전 도마큰시장, 서울 영등포시장에 이어 수유시장에서도 일수업자들의 모습은 요즘 보이질 않는다. 세 곳 모두 미소금융의 재원이 투입된 곳이다. 이 때문에 다른 재래시장에서도 미소금융이 고금리 사채인 일수를 몰아낼 수 있을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힘들게 벌어 일수업자 배 불려준 재래시장 영세상인들

수유시장 상인들도 다른 재래시장과 마찬가지로 일수업자에게 돈을 빌리는 건 아주 자연스런 일상이었다. 신용등급이 낮은 영세 상인에게 은행 문턱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은행에서는 이런 저런 복잡한 대출 서류를 요구했지만 일수업자는 손만 벌리면 빌려줬다.

"100만 원만 빌려줘요." 상인들은 급전이 필요할 때마다 일수업자에게 'SOS'를 쳤다. 한 상인은 "어떤 일수업자가 누구에게 돈을 빌려준 사실이 알려주면 너나 할 것 없이 그 일수업자에게 손을 내밀었다"며 "소문 때문에 일수가 급속히 확산됐다"고 전했다.

일수의 덫은 깊고도 무서웠다. 상인들이 빌린 돈은 많아야 100만 원이었지만 100일에 걸쳐 원금과 이자를 갚아나가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금리도 100일간 20%로 높았다. 예컨대 100만 원을 빌리면 하루 1만2000원씩 모두 120만 원을 갚아야 했다. 연 이자로 환산하면 70%의 살인적인 고금리였다. 그래도 일수를 끊기가 쉽지 않았다. 급전이 필요할 때 손쉽게 일수업자에게서 바로 돈을 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사가 안됐던 건 아닌데 일수에서 벗어나는데 20년이 걸렸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돈을 버는 족족 일수업자에게 이자로 바친 거지 뭐…." 수유시장에서 30년 넘게 장사를 해온 이모씨(65·여)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소금융에 '일수' 서서히 밀려나

40년 수유시장의 역사와 같이 하던 '일수시장'도 미소금융이 들어오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장 상인회가 지난해 미소금융중앙재단으로부터 5000만 원을 받아 자율 대출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조건도 일수에 비해 파격적이라 할 만큼 좋았다. 한 점포당 500만 원 이내, 금리는 연 4.5%, 대출기간은 12개월 이내였다. 상인들이 떼어먹을 것을 염려해 100만 원 이상은 좀처럼 빌려주지 않았던 일수업자와는 달랐다. 수유시장 상인 140여 명 가운데 약 30%인 40여 명이 일수에서 벗어나 미소금융의 혜택을 보고 있다.

이상근 수유시장 상인회장은 "영세한 시장 상인들에게 일시에 큰 돈을 갚으라고 하면 서로 부담이 될 것 같아서 아직까지는 일수 방식으로 원리금을 상환하도록 하고 있다"며 "이자율이 일수에 비해서는 현저히 낮은 만큼 상인들의 호응도 높다"고 전했다.

일수업자를 몰아낸 데에는 상인회가 내건 자격 요건도 한 몫을 했다. 미소금융을 대출받기 전에 일수부터 정리하라고 요구한 것. 이에 맞서기위해 일수업자들은 100만 원을 100일간 빌렸을 때 1만2000원 씩 받던 것을 1만1000원 정도로 낮춰보기도 했다. 그러나 미소금융의 '금리 경쟁력'에 밀려 결국 수유시장을 떠나야 했다.
●다른 재래시장 확산 여부 주목

이런 현상은 수유시장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대전의 도마큰시장, 서울 영등포시장 등 미소금융의 재원이 투입된 여타 시장들에서도 진행 중이다.

다만 이런 현상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지는 아직 지켜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수유시장에서도 상인회 인력이 빠듯한 처지에서 대출을 운용해야 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지금보다 대출 수요가 더 늘었을 경우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 이렇게 되면 일수업자가 다시 고개를 내밀 수 있다는게 상인회가 우려하는 대목이다. 상인회 측은 "자원봉사 삼아하는 일이지만 매일 시장을 돌며 40여명의 상인들한테서 일일이 일일상환금을 받고, 장부를 작성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니다"고 말했다.

미소금융중앙재단은 이 같은 여론을 감안해 최근 발족한 미소희망봉사단을 재래시장 대출인력으로 투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현재 미소금융중앙재단은 전국 176개 재래시장에 128억 원의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장윤정 기자 yun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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