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60주년]무역규모 224:1…1인 소득 18:1…北경제 ‘잃어버린 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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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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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어지는 남북경제 격차

[1965년 평양의 기적?]
“강 양쪽으로 펼쳐진 도시
주민 먹이고도 남을 식량”
1인 국민소득도 南에 앞서

[개방 외면… 기적은 없다]
1990년대 7년간 逆성장
체제 과시하려다 경제 파탄
세계 최빈국 수준으로 추락

“100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는 넓은 강 양쪽에 펼쳐져 있다. 5층짜리 건물들이 있는 넓은 가로수 길과 공공건물, 운동장, 극장과 함께 초호화 호텔도 하나 있다. 빈민가가 없는 도시다. (중략) 1200만 명의 인구를 넉넉히 먹일 수 있는 500만 t의 곡식을 생산한다. 노동자와 종업원들을 위한 완벽한 사회보장 시스템도 있다. 빈곤이 없는 국가다.”

영국의 여성 경제학자인 조앤 로빈슨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1965년 1월 ‘한국의 기적(Korean Miracle)’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여기에서 한국은 남한을 뜻하지 않는다. 도시는 평양을, 국가는 북한을 의미한다. 당시 로빈슨 교수는 3개월 전인 1964년 10월 북한을 방문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 논문을 썼다. ‘북한 정권이 보여주고 싶은 현장’만 둘러봤을 가능성이 크지만, 남북 간 교류가 철저히 단절됐던 1960년대 중반 남한보다 앞선 것으로 평가됐던 북한의 경제상황을 부분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

6·25전쟁 이후 60년이 흐른 지금 북한 경제에 대해 기적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은 없다. 반면 한국은 글로벌 경제질서의 재편 논의를 주도하는 주요 20개국(G20) 의장국으로 발돋움하며 ‘신흥국의 챔피언’으로 떠올랐다. 노벨 경제학상 후보로도 거론된 저명한 경제학자로부터 ‘빈곤이 없는 국가’라는 칭찬을 들었던 북한이 어떤 과정을 통해 헐벗고 굶주린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한 것일까.

○ 갈수록 벌어지는 남북 간 경제 격차

‘18 대 1’은 남북 간의 소득 격차를 함축해 보여주는 숫자로 자주 사용된다. 한국은행은 2008년 기준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GNI)이 1만9296달러로 북한의 1065달러보다 18배 정도 많은 것으로 추정한다. 소득 격차는 한은이 북한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1990년 5.4배에서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다른 경제지표의 격차 역시 크다. 대외 개방 및 수출주도형 경제구조인 남한의 2008년 무역규모는 8572억8000만 달러로 북한의 38억2000만 달러보다 224.4배 많다. 발전량도 남한이 4224억 kWh로 북한(255억 kWh)과 16.6배의 격차를 보인다. 1939년만 하더라도 북한은 한반도 전체 전력의 92%를 생산했다. 이 때문에 광복 후 국토가 분단되면서 남한은 극심한 전력 부족에 시달렸지만 지금은 거꾸로 북한의 전력난이 심각한 상태다.

이 밖에 원유 도입량은 223배, 자동차 생산량은 765.4배, 화학섬유 생산량은 44.3배의 격차가 있다. 북한이 남한에 앞서 있는 분야는 철광석과 석탄 등 일부 원자재 생산에 국한돼 있다.

○ 처음엔 남한보다 잘살았던 북한

남한이 처음부터 잘살았던 것은 아니다. 광복 직후부터 로빈슨 교수가 북한을 방문했던 1960년대까지는 북한의 경제력이 남한보다 앞섰다는 게 통설이다. 1959년 북한의 1인당 소득이 100달러를 웃돌았는데 그때 남한은 81달러 수준에 머물렀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당시 북한의 생활상은 남파 공작원으로 1970년 체포됐던 김진계 씨가 쓴 ‘조국’이라는 수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18년 태어난 김 씨는 남로당 출신으로 전쟁 직후 북한에 정착했다.

“낙심하거나 무기력하지 않고 희망에 넘쳐 열정적으로 전후복구에 참여하는 북한 주민의 생활태도. 남에서 살다가 월북한 나에게는 신선하고도 놀라운 충격이었다. 그들은 전투에 나선 군인들처럼 경제복구건설 사업에 뛰어들었다.”

북한 경제가 남한에 추월당하는 시점은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지만 대략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박정희 정권의 출범과 함께 1962년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2차례의 사업기간을 마친 시점과 비슷하다.

○ “개혁 개방 없이 식량난 해결 불가능”

남한 경제가 수출주도형의 고도성장을 하던 시절에 북한은 거꾸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960년부터 1979년까지 20년 연속 플러스 성장을 하던 북한 경제는 1980년대 들어 플러스와 마이너스 성장을 오가다 1990년부터 1997년까지 1994년을 빼놓고는 내리 역(逆)성장을 했다. 전문가들은 1980년대 체제 과시를 위한 무리한 투자로 경제의 기초체력이 허약해진 상황에서 1990년 전후 동유럽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대외 원조가 끊긴 데서 원인을 찾는다. 1980년대 평안남도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및 남포갑문 투자와 함께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최(1989년)는 북한 경제를 파탄에 빠뜨린 3대 주범으로 꼽힌다.

1980년대 중반 북한의 원산농업대에서 객원강사로 일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계 재미교포 이우홍 씨는 저서 ‘가난의 공화국’에서 1980년대 북한의 궁핍상을 전하고 있다.

“공화국의 식량사정은 1987년 10월부터 악화돼 1인당 300g이던 곡물 배급량이 200g으로 줄었다. 내용도 8 대 2였던 잡곡과 쌀의 비율이 9 대 1로 변했다. 평양에서조차 하루 두 끼 운동이라는 조직적인 내핍운동이 강요되고 있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 사후인 1990년대 중반 60만∼100만 명이 굶어 죽는 ‘고난의 행군’을 겪어야 했다. 전문가들은 세계 곳곳의 최빈국 사례를 감안할 때 북한이 과감한 개혁과 개방을 하지 않을 경우 저성장 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현재의 식량난도 자체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차지완 기자 cha@donga.com


※ 도움말 주신 분=김석진 산업연구원 연구위원, 고일동 한국개발연구원 북한경제연구실장,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신승철 한국은행 국민소득총괄팀 과장, 송지영 통일부 경제사회분석과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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