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밖에 없는 집, 자식에게 물려줘야 한다고?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5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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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대비 먼저” 주택연금 가입 급증

30년간 대기업에서 일하다 1999년 임원으로 퇴직한 김모 씨(69)는 올 3월 경기 용인시 수지구의 5억5000만 원짜리 아파트를 담보로 주택연금에 가입했다. 퇴직한 뒤에도 6년간 중소기업 관련 업무를 하며 용돈벌이를 해왔고 자녀들이 조금씩 보태주는 생활비도 있었지만 퇴직한 지 10년이 지나자 퇴직금과 저축한 돈은 점차 바닥나기 시작했다. 살던 아파트(140m²)를 줄여 노후자금으로 쓰려고도 했지만 작년부터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제값에 팔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경기가 나빠지고 손자들의 교육비 부담이 늘어나면서 자식들에게 손을 벌리기도 낯이 서지 않았다. 주변 친구들은 “평생 고생해서 장만한 집을 날려버리려고 하느냐” “하나밖에 없는 집은 자식들에게 물려줘야 하지 않느냐”며 말렸지만 자녀들은 “부모님의 안정적인 노후가 먼저”라며 선뜻 찬성했다.

김 씨는 이제 매달 주택연금 195만 원에 국민연금 74만 원, 개인연금과 연금보험으로 각각 27만 원을 받으며 아내와 함께 생활비로 매월 320만 원을 쓰면서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150만 원은 아내가 식비, 아파트 관리비 등으로 쓰고 있고 나머지 돈은 김 씨가 경조사비, 자동차 유지비, 통신비, 각종 세금을 내며 관리하고 있다. 그는 “고정수입이 없는 노인이 집 한 채만 갖고 있으면 빈털터리나 마찬가지”라며 “나이가 들수록 돈이 없으니 위축됐는데 이제는 생활비의 60%를 주택연금으로 충당하면서 심적으로, 물질적으로 편안해졌다”고 말했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로 노후생활을 고민하는 고령자가 느는 가운데 집을 담보로 평생 연금을 받는 주택연금으로 눈을 돌리는 은퇴자들이 급증하고 있다. 올 들어 주택연금 신규 가입자는 1월 67명, 2월 117명, 3월 134명으로 꾸준히 늘었다. 지난달에는 180명이 새로 가입하며 2007년 7월 주택연금이 첫선을 보인 뒤 월 가입자 수로 사상 최고치를 나타냈다. 하루 평균 가입자가 지난해엔 4.4명에 그쳤지만 올해는 6.0명으로 증가했다.

주택금융공사 주택연금부 김형목 팀장은 “노후 준비를 제대로 못한 은퇴자들 사이에 ‘집은 자녀에게 물려줄 유산이 아니라 노후 대비용으로 쓸 수 있는 재산’이라는 인식이 확산된 결과”라고 설명했다.

특히 경기침체로 자녀들이 직장을 잃거나 소득이 줄면서 생활비 지원이 줄어들자 유일한 재산인 집을 담보로 스스로 생활비를 충당하려는 노인이 늘고 있는 추세다. 주택연금 가입자 상당수는 “자신의 노후는 스스로 준비하는 것”이라며 “재산을 아끼고 모아 물려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라”고 충고했다.

부동산 버블론이 대두되고 주택시장이 장기침체에 빠지자 집값이 더 떨어지기 전에 가입하려는 이들도 늘고 있다. 경기 고양시의 아파트를 담보로 월 169만 원을 받고 있는 김모 씨(71)는 “작년 9월부터 고민했는데 그때 가입했다면 매달 175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며 “이후 집값이 4000만 원 이상 떨어지면서 수령액도 줄었다”고 말했다.

도입 초기에는 노부부가 주택연금에 가입하면 며칠 뒤 자녀들이 찾아와 계약 해지를 요구하는 사례가 많았다. 김 팀장은 “사업을 하는 아들이 상담창구로 찾아와 ‘누구 마음대로 집을 처분하느냐’며 계약서를 찢어버리는 등 초기엔 집을 두고 부자간 고부간 갈등이 많았다”고 전했다. 하지만 최근엔 자녀들이 먼저 부모에게 가입을 권유하는 사례가 많다. 경기 안양시에 사는 이모 씨(72·여)는 자녀들이 주택담보대출 5000만 원을 대신 갚아주며 주택연금 가입을 권유했다.

33년간 공직생활을 하고 퇴직한 뒤 매달 공무원연금 230만 원을 받는 김모 씨(65)는 목돈 마련을 위해 주택연금에 가입했다. 큰딸의 결혼자금에 보태려고 마포구의 4억2500만 원짜리 아파트를 담보로 우선 목돈 4600만 원을 받은 뒤 매달 78만 원을 받는 형태로 가입한 것. 그는 “앞으로 매달 나오는 78만 원은 적금을 부어 몇 년 뒤 둘째 딸 결혼비용으로 쓸 계획”이라고 말했다.

노후 준비를 전혀 하지 못한 이모 씨(71·부산 금정구)는 퇴직 후 은행 대출로 생활비를 충당하다 보니 어느새 빚이 8000만 원으로 늘었다. 결국 지난해 9월 살고 있던 3억8000만 원짜리 아파트(135m²)를 팔고 1억6000만 원짜리 집(105m²)으로 옮기면서 주택연금에 가입했다. 이 씨는 “주택을 처분한 돈으로 은행대출을 갚고 나머지 돈은 여유자금으로 뒀다”며 “지금은 주택연금 59만 원과 국민연금 40만 원 등 100만 원을 생활비로 쓰고 있다”고 말했다.

정임수 기자 imsoo@donga.com
::주택연금::
고령자가 주택을 담보로 맡기고 사망할 때까지 금융회사에서 연금 형태로 노후생활비를 지급받는 역모기지제도. 연금 수혜자가 사망하면 금융회사가 주택을 처분해 대출금과 이자를 회수한다. 현재 정부가 보증하는 주택연금은 부부 모두 만 60세 이상이면서 집값이 시가로 9억 원 이하인 1가구 1주택 소유자를 대상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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