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가는 중견기업들]<上>‘산업계 허리’ 투자의욕 왜 꺾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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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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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企혜택 사라지고 대기업은 횡포… 스스로 ‘성장판’ 닫는다

○ 두려운 ‘中企졸업’
저리융자 등 혜택 중단, 공공부문 입찰도 제한

○ ‘보호막’도 사라져
대기업 납품 결제 미뤄도 中企와 달리 법은 팔짱만

○ 기업가 정신 증발
안정적 내수시장 의존… R&D투자 매출액 1%대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자동차 부품 생산업체 A사는 최근 흑자도산의 위기를 간신히 넘겼다. 원청업체인 대기업이 부품을 납품 받고도 경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4개월 이상 일방적으로 결제를 미뤘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은 현행 ‘하도급거래 공정화 법률’에 따라 60일 이내에 납품대금을 받을 수 있지만 중견기업인 A사는 이 범주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A사 관계자는 “대기업으로부터 납품대금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재하도급 업체에는 60일 이내에 납품가를 지불해야 하는 이중고(二重苦)에 시달리고 있다”며 “운영자금 문제로 쪼들리다 보니 기술 개발은 뒷전일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현재 전체 중견기업의 47.9%가 대기업의 1차 협력업체에 속할 정도로 중견기업의 대기업 종속 현상이 심각한 상황이다.

○ 보호막과 횡포 사이 ‘샌드위치’

A사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중소기업에서 벗어난 중견기업은 정부 보호를 받지 못하면서 대기업에 휘둘리는 ‘샌드위치’ 신세다.

하도급법뿐만이 아니다. 중소기업을 졸업하는 순간 이전에는 해당되지 않던 각종 환경규제와 수도권 규제, 지방이전 등 입지 관련 규제를 받게 된다. 중소기업청의 연구개발(R&D) 지원 대상에서도 제외되는 등 R&D 투자와 자금 확보에도 애로를 겪게 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중견기업은 R&D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2007년 중견기업의 R&D 투자 규모는 2조476억 원으로 대기업(14조7228억 원)과 중소기업(4조5685억 원)에 크게 못 미쳤다.

김갑수 KAIST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해외 판로를 개척하지 못하고 대기업에 단가 인하 압박을 받고 있는 대부분의 중견기업은 R&D 투자를 할 만큼 영업이익을 올리지 못한다”며 “사업성이 너무 좋으면 대기업에 사업을 뺏길 소지도 있어 일부러 적정 수준까지만 성장하려는 경향도 있다”고 분석했다.

○ 공공조달시장 경쟁에도 참여 못해

사무가구 전문업체인 퍼시스의 이종태 대표는 벌써부터 2012년 1월이 걱정된다. 지난해 개정된 중소기업기본법 시행령에 따라 이 회사는 2012년 1월 중소기업에서 ‘졸업’하게 된다. 새 시행령은 중소기업 범주에 관계사의 매출과 자기자본 등을 포함하도록 하는 등 중소기업 요건을 강화해 사실상 중소기업 범위를 축소했다. 퍼시스는 관계사를 포함해 전체 근로자 1400여 명, 매출액 2300억 원을 올린 대표적인 ‘중견기업’에 속한다.

하지만 근로자 300∼999명의 기업을 뜻하는 중견기업이라는 표현은 법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중소기업 아니면 대기업으로 분류하는 현행 이분법적 기준에 따르면 퍼시스는 대기업(근로자 1000명 이상) 범주에 들어간다.

정부는 ‘중소기업자 간 경쟁품목’을 고시하고 공공기관이 가구 등 210여 개 품목을 구매할 때 중소기업 제품만 사용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퍼시스는 공공부문 조달시장에 참여하기 위해 그동안 분사(分社)하는 방식으로 중소기업 외피를 유지했지만 2012년부터 중소기업 요건이 강화되면서 이마저도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매출의 큰 부분을 공공부문 납품에 의존하다가 중기 졸업으로 조달청 판로가 막히면 돌파구 마련이 쉽지 않다는 얘기다.

기업은행 IBK경제연구소가 지난해 중견기업 진입을 앞둔 250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중소기업의 78.2%가 ‘중소기업에서 벗어나면 경영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본다’고 답했다. 조사 대상 기업의 30.9%(복수 응답)는 “기업 규모가 커지면 기업 분할 등을 통해 중소기업에 잔류하겠다”고 밝혔다.

또 조사 대상 중소기업의 55.0%가 ‘축소지향적 경영’을 하겠다고 응답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한국에서 근로자 250명 이상 기업의 비중은 0.2%에 그친다. 미국(11.7%) 등 주요 선진국에 크게 뒤지는 것은 이런 축소지향적 경영의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산업계에서는 하루빨리 법적으로 중견기업 범위를 정하고 중소기업에서 졸업하는 중견기업이 공공 부문에도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 중견기업의 안전 지향도 문제

중견기업의 ‘발육 부진’은 제도 탓만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상당수의 중견기업 경영자들이 안정적인 내수 시장에만 의존하고 해외 시장 진출을 적극 시도하지 않는 등 기업가 정신이 결여된 점도 문제라는 주장이다.

김갑수 교수가 종업원 300∼999명 또는 매출 1000억∼1조 원 미만인 중견기업(2007년 기준) 1102개사를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이들 기업의 매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평균 13.2%에 그쳤다. 이들의 평균매출은 2406억 원, 수출액은 365억 원이었다. 또 평균매출액 대비 R&D 투자액(R&D 집약도)은 1.32%에 그쳤다. 이들 기업의 86%가 수출 비중 30% 미만인 내수 기업으로 나타났다. 독일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 박사가 정의한 ‘히든 챔피언(세계 시장을 지배하는 작은 기업)’의 요건인 평균매출 4770억 원, R&D 집약도 5.9%, 수출 비중 61.5%와는 거리가 멀다.

국내 제약업계 10위권인 B사는 제약회사라기보다는 음료회사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제약보다는 각종 건강음료로 매출액의 절반가량을 벌어들이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음료를 팔아 번 돈을 신약 개발에 쓰겠다”고 했지만 2008년 매출 대비 R&D 투자 비중은 2.1%에 불과했다. 외국의 제약사가 매출액의 16∼30%를 R&D에 투자하는 것을 고려하면 매우 낮은 수준.

투자가 정체되면서 중견기업의 고용도 제자리걸음 수준이다. 2000년 이후 2007년까지 연평균 고용증가율은 중소기업 1.0%, 대기업 ―1.1%, 중견기업 ―3.3%로 중견기업의 고용창출 효과가 가장 크게 떨어졌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공동기획: 기업은행 IBK경제연구소·동아일보

: 중견기업 :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중간 규모에 해당하는 기업을 뜻한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중소기업과 대기업만 있을 뿐 중견기업은 없는 상태다. 한국중견기업연합회는 중견기업을 ‘근로자 수 300∼999명이거나 매출액 1000억∼1조 원인 기업’으로 하되 대기업 계열사는 제외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정부는 중견기업의 기준과 지원정책을 논의 중이다.

佛 “중견기업 2000개 2012년까지 추가 육성”

외국의 체계적인 대책

덴마크의 풍력에너지 기업인 베스타스, 프랑스의 특수직물 전문기업 딕슨콩스탕, 스위스의 손목시계 조절장치 생산업체 니바록스, 독일의 스마트카드 칩 모듈 접착제 업체 델로….

국내에는 이름이 생소하지만 관련 분야에서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에 오른 ‘히든 챔피언’들이다. 선진국에는 이처럼 세계 시장을 지배하는 중견기업들이 많다. 체계적인 중견기업 지원 정책으로 각 분야의 강소기업들을 발굴하고 육성하고 있는 것. 중견기업 지원 방안을 내놓기는커녕 중견기업의 ‘정의’조차 없는 한국의 기업 현실과는 판이한 대목이다.

프랑스는 2008년 ‘경제 현대화법’을 도입해 근로자 수 250∼4999명인 기업을 중견기업으로 규정하고 지원에 나섰다. 당시 프랑스의 중견기업은 약 4000개. 영국(약 8000개)과 독일(약 1만2000개)에 크게 뒤지자 프랑스 정부가 위기감을 느끼고 2012년까지 2000개의 중견기업을 더 육성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 프랑스는 중견기업이 연구개발(R&D)에 필요한 박사급 고급 인력을 채용할 때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고 있다.

독일은 2006년 연방교육연구부(BMBF)가 마련한 중견기업 육성정책에 따라 기업의 발전 단계를 창업-성장-확장의 3단계로 구분하고 맞춤형 지원정책을 쓰고 있다. 성장단계에서는 대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정보 공유 및 인력 확보가 가능하도록 정책적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으며, 확장단계에서는 글로벌 경쟁에 필요한 첨단기술 개발을 지원하고 있다.

중국도 중소기업촉진법에 근거해 중견기업에 대한 자금과 기술, 시장개척 지원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국가 지정 하이테크기업으로 선정되면 기업 소득세율이 25%에서 15%로 떨어지는 등 중견기업의 첨단기술 개발 및 수출 경쟁력 확보에 주안점을 둔 정책을 펼치고 있다.

한편 한국중견기업연합회는 최근 △중견기업에 대한 맞춤형 R&D 정책자금 신설 △제조업 등 특수 업종에 대한 외국인 고용허가제 확대 △하도급법상 해당 기업을 중견기업에 확대 △공공구매제도 중 중소기업 경쟁제품 지정의 현실적인 변경 △조세특례제한법의 분류 기준을 기존 중소기업-대기업에서 중소기업-중견기업-대기업으로 세분 등 개선 방안을 정부에 건의했다.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유덕영 기자 fir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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