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없는 특허전쟁 시대]<下>한국의 현실과 대응

  • 입력 2009년 8월 26일 02시 55분


특허 하찮게 여기던 기업들 ‘발등에 불’
국내기업, 사업으로 매출 올려도
이익은 외국 특허권자의 몫
특허출원 세계 4위 한국
특허수지는 적자 못면해

지난해 말 ‘세계 최대의 특허괴물(Patent Troll)’인 인텔렉추얼 벤처스(IV)가 한국에 진출해 국내 교수들의 연구 아이디어와 특허를 싹쓸이하자 관계 당국과 대학이 발칵 뒤집혔다. 반발이 의외로 거세지자 IV는 “한국에서 확보한 특허의 사용료를 한국기업에는 요청하지 않겠다”고 꼬리를 내렸다. 하지만 IV에 특허를 넘긴 한 교수는 “국내 대기업에 꼭 특허료를 받아 달라”며 “잘 안 되면 소송이라도 걸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IV는 “지금까지 대기업들이 아이디어를 헐값에 가져가고 이익을 나눠주지 않았다는 것이 이 교수의 주장이었다”고 전했다.

○ 갈등을 파고든 특허괴물

산업용 필름, 포장재를 생산하는 중소기업 한진피앤씨는 지난해 1월 새로운 개념의 포장재 특허 등록을 마쳤다. 이 제품은 지난해에만 20억 원어치가 팔렸다. 그런데 중소업체 A사가 유사품을 만들어 대기업에 대량으로 납품했다.

한진피앤씨는 ‘특허 침해’라며 A사에 대해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대기업 측에는 이 제품을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 대기업은 “우리가 특허를 침해한 것은 아니다”라며 A사로부터 계속 제품을 납품받았다. 이수영 한진피앤씨 대표는 “많은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지적재산권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IV가 한국에서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은 아이디어와 특허를 가진 개인과 중소기업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해 생겨난 갈등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IV가 돈을 싸들고 와 ‘토종’ 특허를 사들이니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생산설비와 거대한 판매조직 없이도 아이디어만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발명 자본주의(Invention Capitalism)’가 가져온 변화이다.

홍국선 서울대 교수는 “국내 대기업은 토종 지식재산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거대 특허괴물이 싹쓸이하는 것을 보고서야 긴장하기 시작했다”며 “국경과 분야에 관계없이 특허를 긁어모아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경쟁이 특허괴물과 기업 사이에 벌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정부 대책 미흡

특허괴물은 지식재산의 가치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한국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한국의 특허출원 건수는 미국 일본 중국에 이어 세계 4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특허로 돈을 벌어들이는 기술무역수지는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에 따르면 한국의 지식재산 보호 순위는 57개국 중 33위에 그친다.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는 지난달 특허괴물에 대응해 토종특허를 지켜내는 5000억 원 규모의 지식재산관리회사를 민관 공동출자로 만들기로 하는 등 대책을 내놓았다. 정책총괄기구인 국가지식재산위원회를 만들고 소송관할제도도 특허법원 중심으로 개선키로 했다.

그러나 삼성전자 LG전자 등 주요 기업들은 펀드 결성에 참여하겠다는 결정을 내리지 않아 5000억 원 재원 마련이 불투명한 상태다. 주요 기업과 합의를 제대로 거치지 않고 정부가 앞서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 또 펀드의 민관 합동 체제에 대한 비판도 있다. 한 특허전문가는 “정부가 운영에 관여하는 특허펀드가 미국시장에서 소송을 자유롭게 제기할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정부가 운영하는 펀드가 특허의 옥석을 제대로 가리지 못해 과거 벤처 펀드가 경험한 실패를 거듭할 수 있다는 우려도 많다.

○ 공세적 특허제도 도입해야

외국의 특허공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공격적 전략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국내 특허제도는 외국기업의 특허 싹쓸이를 막기 위해 상대적으로 등록이 까다롭게 만들어 놓아 국내 기업의 특허를 적기에 등록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는 지적이다. 정상조 서울대 법대 교수는 “지금까지는 국내 대학과 기업들이 싸구려 특허를 많이 등록해 방어하는 데만 사용해왔다”며 “이제는 특허의 질을 높이고 영업이 잘될 수 있도록 공세적인 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앞으로 급증할 특허 소송에 특화된 법적 대응 체제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상희 대한변리사회 회장은 “특허전쟁은 기술영토를 지키는 방어전과 같은 것”이라며 “우리도 소송전문인 변호사와 기술전문인 변리사의 특허소송 공동대리제도를 도입한 일본처럼 변호사와 변리사의 공동 방위군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용석 기자 nex@donga.com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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