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원자력이다]맨손으로 일으킨 ‘원자력 독립국’

  • 입력 2009년 6월 25일 02시 55분


《“한국은 자원 빈국이 아니다. 석탄은 땅에서 캐는 에너지이지만, 원자력은 사람의 머리에서 캐내는 에너지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의 전력 계통 복구를 주도했던 미국 전기기술의 대가 워커 시슬러가 1956년 이승만 전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한 말이다. 6·25전쟁 이후 빈곤과 무질서에 허덕이던 당시 한국에 원자력은 그렇게 ‘희망’같이 다가왔다. 한국은 1956년 미국과 원자력협력협정을 체결해 관련 기술개발과 산업화에 뛰어든다. 1960년대에는 원자력 발전의 청사진을 마련했고, 1970, 80년대 본격적인 기술 개발을 거쳐 1990년대 자립적인 기술 개발에 주력했다. 이후 2000년대 기술 고도 성장기를 거친 원자력은 이제 녹색성장의 새로운 동력으로 주목받고 있다.》

전쟁 폐허 → 원전 6대 강국… 무에서 유를 만든 반세기 도전

○ 6·25 전후 국가발전의 새 희망, 원자력

1956년 미국과 원자력협력협정을 체결했고, 같은 해 3월 당시 문교부 기술교육국에 원자력과를 신설하면서 한국은 원자력 기술개발 및 산업화를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돌입했다. 1959년에는 원자력원(현 교육과학기술부)과 국내 최초의 원자력 연구기관인 원자력연구소(현 한국원자력연구원)도 문을 열었다. 이 같은 움직임은 학계로도 이어져 1958년 한양대에 국내 최초로 원자력공학과, 1959년 서울대에 원자력공학과가 각각 개설되면서 원자력 미래인재 양성이 본격화됐다. 1959년 7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원자력계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내 최초 연구용 원자로인 ‘TRIGA Mark -Ⅱ’의 기공식을 개최했다. 대한민국 원자력 기술개발의 첫 신호탄이 쏘아 올려지는 순간이었다.

1960년대 국내 전력 소비량은 급증하기 시작했고, 부족한 에너지자원 확보를 위한 원자력 발전의 청사진도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962년 정부는 ‘원자력발전대책위원회’를 구성해 국내 최초로 ‘원자력발전 추진계획’을 수립했다. 제1호 원전건설을 위한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1964년 기초조사가 시작된 후 4년여 만인 1968년 기상·지질 등 다양한 기초조사 끝에 경남 양산시 고리지역이 최종 원전 후보지로 선정됐다. 이어 정부는 각국의 원전 정책 및 기술개발 현황 등을 정책수립에 반영하기 위해 1966년부터 ‘원자력발전조사위원회’를 꾸려 미국 등 해외선진국 사례조사에도 착수했다.

○ 본격적 개발기

1971년 3월 19일 전 국민의 이목은 국내 최초의 상업용 원전인 고리1호기 기공식이 개최된 경남 고리에 집중됐다. 가압경수로인 고리1호기는 설비용량 58만7000kW, 총 1560억7300만 원이 투입된 당시 국내 최대 규모 사업이었다. 기공식에 운집한 1만 명의 주민과 관계자들은 고리1호기에 ‘한국의 희망’을 담았고, 결국 1978년 고리1호기는 성공적으로 준공돼 가동에 들어갔다.

세계에서 21번째,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번째 원전보유국이 된 것이다. 이후 원전 기술 국산화와 지속적인 기술 축적을 위해 고민하던 정부는 고리 3, 4호기의 발주방식을 기존에 외국 계약자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턴키형 발주방식’에서 ‘분할발주 방식’으로 전환했다. 원전 기술 확보를 위한 성공적인 첫 걸음이었던 셈이었다.

이어 1980년대 정부는 원전설계 및 기자재 국산화율 95% 달성을 목표로 하고 원전 건설 방식을 국내 ‘사업자 주도방식’으로 전환했다. 1980년대에는 또 원전 기자재 국산화뿐 아니라 원자력 발전의 연료가 되는 핵연료의 국내생산 및 국산화를 위한 본격적인 기술개발도 시작됐다. 진정한 원자력 발전의 국산화를 위해서는 발전의 뿌리가 되는 ‘연료 국산화’가 반드시 뒤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핵연료 국산화 사업은 1976년 12월 설립된 한국핵연료개발공단(현 한전원자력연료주식회사)과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주도로 이뤄졌다.

1981년부터 본격 시작된 중수로 핵연료 국산화 산업은 1985년 핵연료 양산기술 개발에 성공하고 1987년 7월 월성원전에 핵연료 공급을 개시함으로써 본격화됐다.

○ 기술자립 성숙기

1990년대 경제발전을 지속하던 한국은 급증하는 전력수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지속적인 원전건설 정책을 폈다. 특히 한국표준형원전 개발과 해외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했다. 1995년 준공된 영광 3.4호기는 기술자립 뿐 아니라 외자의존도를 17%까지 낮췄다. 최초의 한국표준형원전인 울진 3. 4호기는 원전의 두뇌에 해당되는 원자로계통(NSSS. Nuclear Steam Supply System)을 순수 국내기술로 설계했다. 원전기술 해외진출 꿈도 조금씩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1993년 한전은 기술본부 내에 별도의 해외사업추진팀을 발족하고 ‘중국 진산 중수로건설사업’ 등 본격적인 해외사업을 추진한다. 당시 한국전력기술은 설계기술,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은 원전 설비 및 기자재 제작, 대우건설은 해외 원전건설사업에 진출하면서 한국 원자력산업이 새로운 한국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그 가능성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 원자력, 녹색성장의 동력으로 부상

2000년 우리 원자력계는 누계발전량 1조 kWh 달성이라는 눈부신 성과를 거뒀다. 1조 kWh는 서울시에서 35년간 사용할 수 있는 전력량으로 이로 인한 국민의 경제적 부담 경감액은 약 18조 원으로 추산됐다. 또 2005년 한국표준형원전의 완성판이라 할 수 있는 울진 5, 6호기의 준공으로 한국은 총 20기의 원전을 보유한 세계 6위 원자력 대국으로 발돋움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원자력은 녹색성장의 동력으로 재조명받고 있다. 녹색성장을 새로운 국정비전으로 내세운 현 정부는 2008년 8월 국가에너지기본계획을 통해 화석에너지의 비중을 크게 낮추는 대신 2030년까지 원자력 등 저탄소에너지 비중을 전체 에너지원의 39%까지 확대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원자력은 온실가스 배출이 거의 없고 발전단가도 낮아 경제성이 높은 데다 고유가 시대 및 국제적인 환경규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 에너지 대안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2030년까지 원자력발전량 비중을 전체 전력의 59%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김정안 기자 credo@donga.com

▶ 새로운 희망, 원자력 (50, 60년대)

1957: 한국, 국제원자력기구(IAEA) 정식 가입

1959: 국내 최초 연구용 원자료 TRIGA MARK-II 기공

1959: 원자력 연구소(현 한국원자력연구원) 설립

1962: 원자력발전대책위원회 구성. 원자력 발전 추진 계획 수립

▶ 기반 마련 및 본격적 기술개발 (70∼90년대)

1971: 국내 최초 원전 고리1호기 착공

1988: 경수로용 핵원료 국산화 성공

1995: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 자력 설계

1999: 연구로용 개량 핵연료 개발

▶ 원자력, 녹색성장의 동력 (2000∼현재)

2006: 원자력발전소 이용률 세계 3위

2008: 이명박 대통령 ‘저탄소 녹색성장’ 비전 발표

미래 원자력 시스템 개발에 대한 장기 계획 수립

국가에너지기본계획 수립(2030년까지 원자력 발전소 18기 추가 건설, 원자력 발전량 비중 59%까지 확대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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