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항의전화냐” 벨 울릴때마다 화들짝

  • 입력 2008년 10월 16일 02시 59분


최근 주가가 폭락하면서 손실을 본 투자자들의 항의가 이어져 증권사 영업사원들은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10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증권선물거래소에서 거래소 직원이 폭락하는 증시 그래프 앞에서 근심에 젖어 있다. 홍진환  기자
최근 주가가 폭락하면서 손실을 본 투자자들의 항의가 이어져 증권사 영업사원들은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10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증권선물거래소에서 거래소 직원이 폭락하는 증시 그래프 앞에서 근심에 젖어 있다. 홍진환 기자
길어지는 증시 침체…잠 못 이루는 증권사 영업사원들

불안한 마음에 오전 4시에 깨 美증시 확인

20%가 만성두통… ‘한직 발령’ 악몽까지

“실적 높이려 무리하게 투자 권유” 자성도

국내 증권사 지점의 영업사원 김모(39) 씨는 요즘 전화벨 소리만 들리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전화의 대부분이 주식 및 펀드에 투자해 손실을 입은 투자자의 항의 전화다.

항의 내용도 “원금이 왜 손실 났느냐”에서부터 “다른 증권사는 손실이 적다는데 여기는 왜 이러냐” “손실이 더 커지기 전에 왜 환매 제의를 안 했느냐” 등 다양하다.

김 씨는 “지방의 한 증권사에 ‘투자자가 화염병을 들고 나타나 넋두리를 했다’는 등 확인 안 된 흉흉한 소문까지 돌고 있다”며 “끊었던 담배도 다시 피우게 됐다”고 괴로워했다.

증시 침체가 1년 가까이 이어지면서 증권사 지점에서 주식매매, 금융상품 판매 등을 담당하는 영업사원들이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코스피지수는 지난해 10월 31일 2,064.85로 최고점을 찍은 뒤 이달 15일 1,340.28로 약 35% 폭락했다. 2003년 이후 장기간 증시 호황이 이어지다 미국발(發)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라는 예상치 못한 ‘외부변수’로 증시가 폭락했기 때문에 고객에게 위험을 알리는 등 대처할 겨를도 없었다. 증시 침체가 세계적인 현상이라 국내 증시 투자로 입은 손실을 만회할 대안도 마땅치 않다.

굿모닝신한증권 여의도지점 곽상준 과장은 “영업사원의 20%는 만성 두통, 허리 통증 등 신경성 질환을 앓고 있다”며 “밤마다 한직으로 발령이 나거나 고객에게 항의를 듣는 악몽을 꾼다는 동료가 많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본사에서 일하는 것을 ‘답답하다’고 느끼는 영업사원들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본사에서 인력충원 공고가 나면 서둘러 지원해 경쟁률도 높아졌다. 투자자를 직접 만나지 않아도 되는 자리이기 때문.

현대증권 영동지점 박상우 대리는 “미국 증시에 따라 국내 증시 등락이 결정되는 만큼 자다가 오전 4시쯤에 깨서 미국 지표를 확인하고 다시 잠을 자거나, 오전 2시까지 깨어 있으면서 확인한다. 그래야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다.

최근 몇년 새 증권사에서 파는 금융상품이 펀드, 주가연계증권(ELS), 랩어카운트 등으로 다양해진 것도 투자자 항의가 늘어난 원인이다.

주식은 고객이 홈트레이딩시스템(HTS)으로 직접 투자하거나 영업사원에게 선택 종목을 알려주지만 기타 금융상품은 직원의 권유로 가입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증권업계에서는 투자자에게 손실 위험을 충분히 알리지 않았고 실적을 높이기 위해 무리하게 투자를 권했다는 자성(自省)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국내 증권사 지점의 한 영업사원은 “지난해 말 주가지수가 2,000을 넘었을 때 개인적으로는 펀드 환매를 권유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본사에서 영업점 실적을 매길 때 펀드 판매 실적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또 다른 증권사의 영업사원 황모 씨는 “ELS, 펀드, 주식을 똑같이 100억 원어치 팔았더라도 개인 실적으로 인정되는 비율은 ELS가 가장 높아 성과급 책정 시 유리하다”며 “최근 ELS 손실 가능성이 커지면서 고객에게 손실 위험을 충분히 알리지 않았다는 자책감이 든다”고 말했다.

이지연 기자 chanc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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