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 파생상품 만들기 광풍…뭐가 얼마나 위험한지도 몰라

  • 입력 2008년 9월 17일 19시 57분


■ ‘카지노자본주의’ 몰락

지금의 '월가(街)의 위기'는 카지노 자본주의의 몰락이다.

작년 8월 서브 프라임(비우량주택담보대출) 사태가 촉발되면서 일부에서 나온 평가다. 미국의 금융시스템이 다시 요동치면서 전 세계 경제전문가들 사이에서 이 평가는 공감을 얻어 메아리처럼 퍼져나가고 있다.

1980년대 후반 경기침체로 수익성이 악화된 투자은행(IB)들은 살 길을 찾기 위해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자기자본 없이 남의 돈을 빌려 하는 투자(레버리지)를 감행했고 '첨단 금융공학'을 동원해 고수익을 보장해준다는 파생상품을 만들어냈다. 어느 누구도 그 위험이 무엇인지, 누가 위험을 떠안게 되는지 모른 채 시장만 팽창해 갔다.

10여년 이상 곪아 온 위기가 이제야 터진 것은 저금리라는 진통제 덕분이었다. 경기부양을 원했던 미국 정부는 지속적인 저금리 정책을 이어갔고 유동성을 키웠다.

무모한 고위험 투자와 지나친 탐욕, 규제완화의 도를 넘어선 정부의 자유방임 정책. 이 잘못된 조합은 전체 금융시장을 거대한 도박판처럼 만들어 세계 경제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미국, 유럽 등 전 세계 금융당국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금융관련 규제를 원점에서 검토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모래사장위에 집을 지었던' 카지노 자본주의의 행태에 대해서는 강력한 규제가 가해질 것으로 보인다.

●자신과 시장에 대한 맹신

투자은행의 가장 큰 무기인 파생상품은 1970년대부터 이어진 금융공학의 발달로 전성기를 맞았다. 뱅커들은 금융공학을 이용하면 채권이나 증권 등 금융상품의 위험도를 항상 정확하게 잴 수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금융회사들은 '로켓 과학자'라 불리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 출신 수학자와 물리학자들을 월가에 초청하느라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이들은 이론에는 능했지만 경제의 다양한 돌발변수를 예측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가장 큰 사례는 수학자와 공학자, 경제학자들이 모여 만든 헤지펀드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의 파산이었다. 이들은 과거의 수익률 패턴을 과학적으로 분석했다고 자부하면서 자기 돈의 수십 배가 넘는 투자를 감행했지만 러시아의 모라토리엄(채무지불유예)을 예상치 못하고 1998년 파산했다.

리먼브러더스와 메릴린치 등 최근 몰락한 IB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나름대로 위험 분산을 한다며 금융기관의 모기지 채권을 한 데 모아 리스크에 따라 잘게 쪼개 투자자들에게 팔았다. 그 자체로는 완벽한 구조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미국 주택가격이 급락하면서 서브프라임 사태가 오게 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 했다.

한국증권연구원 신보성 금융투자산업실장은 "LTCM나 지금의 투자은행들은 시장이나 자산가격이 자기 예측대로 움직일 것이라는 전제 하에 차입투자를 감행했다"며 "그러나 위기가 오면 기존에 예측한 수익 패턴들이 한꺼번에 송두리째 무너지는 취약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더구나 파생상품은 기초자산 하나를 놓고 수차례나 유동화를 할 수 있다는 속성을 가졌다. 경기가 호황이고 대출 상환이 잘 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집단 지급불능 사태가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한 금융계 관계자는 "앞으로 자산의 과도한 유동화를 이용해 돈을 버는 모델은 투자은행 업계에서도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정책실패와 모험을 부채질하는 보상체계도 한 몫

저금리가 너무 오래 지속됐던 것도 투자은행들의 무모한 도박을 부추긴 요인이다.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2000년대 초 10여 차례에 걸쳐 정책금리를 인하했다. 정보기술(IT) 버블이 꺼진 뒤 침체된 경기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마에스트로'라고 한때 추앙받던 그린스턴 전 의장도 이번 사태에 일정부분 기여했다는 것이 금융계의 평가다.

투자은행들은 저금리 시대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마진을 얻으려고 투자 대상을 넓혔다. 이들은 저금리 시대에 신용도가 높은 채권은 수익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채무상환 능력이 의심스러운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에까지 손을 댔다.

월가의 단기실적 지상주의와 지나친 성과위주의 보상 시스템도 금융위기에 한 몫을 했다.

투자은행 직원들은 위험한 투자를 해서 대박을 내면 두둑한 보너스를 받지만 만약 큰 손실을 내더라도 그냥 직장을 관두면 된다. 한국투자증권 김범준 전무는 "IB에서는 대부분의 성과 보상이 1년 단위로 끊어져 있는데다 해고가 되더라도 계속 인력 스카우트가 일어난다"고 말했다.

최고경영자(CEO)들의 리스크를 따지지 않는 독선적인 경영 스타일도 도마에 오른다. 파이낸셜타임즈(FT)는 "리먼의 리차드 풀드 CEO는 군대식 경영으로 자신의 경영방식에 대한 비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며 "이것이 호황기에는 리먼이 경쟁사보다 발빠르게 대처하는 계기가 됐지만 결국 불황기에 발목을 잡았다"고 비판했다. 메릴린치의 스탠리 오닐 회장도 부채담보부증권(CDO) 사업의 위험이 과도하다는 문제제기를 한 임원들을 해고해버렸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16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1929년 공황과 비교되는 이번 위기는 금융기관의 부정직성과 정책결정자의 무능에서 나온 산물"이라고 비판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이지연 기자 chanc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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