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청약제도 무용지물…‘깜깜이’ 분양 확산

  • 입력 2008년 5월 6일 19시 27분


이모(40·대구 수성구)씨는 올 3월 집 부근의 모델하우스를 보러 갔다가 그냥 발길을 돌렸다. 청약공고에 이어 청약접수까지 끝났지만 모델하우스는 닫혀 있었다. 건설사가 분양할 아파트를 보여주지 않은 채 청약 절차를 끝낸 것이다. 이 모델하우스는 4월에야 문을 열었다. 주택업계의 표현을 따르면 이른 바 '깜깜이' 분양이었기 때문이다.

지방 아파트 시장에 불황 극복 마케팅의 하나로 모델하우스를 공개하지 않은 채 청약 절차를 끝내버리는 깜깜이 분양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고의로 청약률 '0'(%)를 만든 후 일정 기간이 지나 선착순 분양에 나서는 것. 올 들어 지방에서 공급한 아파트 가운데 50% 이상이 깜깜이 방식으로 분양될 정도다.

K건설 관계자는 "어차피 청약접수를 해도 대량으로 미분양이 나올게 뻔한데 청약공고 직후 모델하우스를 열어봐야 비용만 더 든다."며 "지방에서 청약제도는 무용지물이 된지 오래"라고 말했다.

●"초기 대량 미분양보다 청약률 '0'가 낫다"

올 초 경남에서 분양한 A아파트. 청약접수를 받은 결과 10명 남짓만 신청했다. 수요자에게 철저히 외면당한 것. '대량 미분양 아파트'라는 인식만 주민들에게 심어준 꼴이 됐다.

주택업체는 미분양이라는 '딱지' 못지않게 청약공고 때부터 들인 비용도 아깝다. 주택법에 따라 청약공고, 청약접수, 당첨자 발표 및 계약 등에 걸리는 기간은 30일 남짓. 이 기간 동안 모델하우스를 운영하고 홍보에 들인 비용은 10억 원에 이른다.

A사 관계자는 "깜깜이로 하는 게 나았을 것 같다"고 밝혔다. 주택법에 따라 어차피 해야 하지만 주민들이 잘 모르게 청약절차를 끝내 버린 후 시장상황을 봐서 대규모 홍보와 함께 선착순으로 분양하는 게 낫다는 얘기다.

S건설 영업팀장은 "깜깜이로 분양하면 청약률 '0'%에서 공급하므로 선착순 분양이 사실상 첫 분양"이라며 "미분양 아파트라는 나쁜 이미지를 피하고, 비용도 아끼고, 더 좋은 타이밍(모델하우스 개관 시기)에 홍보력을 집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수요자, "나쁠 거 없다"

올 초 경북에서 아파트를 공급한 B건설도 깜깜이 방식을 선택했다.

발행부수가 몇 부 안되는 지역신문을 골라 청약공고를 내고 "쉬쉬"하며 청약접수를 마쳤다. 그런데도 청약한 사람이 있었다. 딱 한명이었다. 이 회사는 청약률 '0'%를 만들기 위해 청약한 사람에게 계약을 만류했다.

회사 측은 "조만간 선착순으로 분양할 때 청약하시는 게 낫다. 선착순 분양 때는 원하는 동(棟), 호수를 마음대로 골라잡을 수 있다."고 설득했다. 청약을 원했던 소비자는 회사의 설득을 받아 들였고 업체는 결국 청약률 '0'를 만들 수 있었다.

수요자들도 깜깜이 분양에 대해 나쁠 게 없다는 반응이 많다. 법적 절차에 따라 청약을 하면 추첨에 의해 동, 호수가 결정되지만 선착순 분양 때는 좋은 층을 골라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2일 대구의 C아파트 모델하우스에서 만난 주부 김정선씨는 "깜깜이 분양 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지만 모델하우스에서 상담을 받은 후 원하는 동, 호수를 선택하는 게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미분양일 때는 청약제도 무용지물

소아과 의사인 서모씨(40)는 올 2월 울산에 짓는 H아파트 모델하우스를 보러 갔다가 헛걸음을 했다. 이 아파트도 깜깜이 분양이었던 탓에 모델하우스를 보지 못한 것.

그는 "물건을 보여주지도 않고 판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업체 측에 따졌다. 서씨는 "수요자 입장에서 손해 볼 건 없지만 청약제도 자체가 무용지물인 것 같다"고 말했다.

주택업계도 비슷한 입장이다.

청약경쟁이 뜨거울 때 만든 제도가 미분양이 넘쳐나는 지방 시장에서 제대로 적용될 리 없다는 설명이다. 이 때문에 투기과열지구 등으로 지정된 곳에서만 법적 청약절차를 지키도록 하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주택산업연구원 장성수 연구실장은 "깜깜이가 편법이지만 주택업체로서는 어쩔 수 없는 판매 전략"이라며 "근본적으로 '후분양' 제도가 정착돼야 편법들이 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은우기자 lib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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