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늘리자” “비정규직 보호” 충돌

  • 입력 2007년 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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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 출범 바로 전해인 2002년 37조9400억 원이던 복지 분야의 예산은 2007년 61조3800억 원으로 5년간 23조4400억 원 늘었다. 정부는 또 올해부터 매년 평균 9.1%씩 복지 예산을 늘려 2010년에는 79조4125억 원으로 늘릴 예정이다.

성장보다 복지를 강조해 온 현 정부의 정책 방향에 맞춰 복지 분야 예산이 계속 확대되면서 ‘균형재정’이라는 정부의 또 다른 중요한 정책 목표를 위협하고 있다.

나라의 ‘일반 살림’ 상태를 보여 주는 ‘관리대상수지’(예산과 기금을 포괄하는 통합재정수지에서 국민연금 등 사회보장성 기금을 뺀 것)는 2004년부터 매년 적자를 내고 있으며 올해에도 10조 원 이상의 적자가 예상된다.

이처럼 재정 적자가 늘어나면 복지에 쓸 재원(財源)이 부족해지면서 복지와 균형재정 둘 다 놓치게 된다.

현 정부 들어 한 경제정책이 다른 정책의 목표를 훼손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전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 정책의 취사선택 없이 모든 일을 임기 안에 해결해 보겠다는 ‘의욕 과잉’이 불러온 상황이다.

○ 균형발전 정책과 충돌한 부동산시장 안정 정책

현 정부가 행정도시 건설 등 각종 국토균형발전 정책을 추진하면서 이에 따른 토지보상금은 천문학적으로 늘고 있다. 2003년(10조352억 원) 처음으로 10조 원을 넘어선 이후 지난해에는 23조 원(잠정)으로 갑절 이상으로 늘었다. 올해도 5월부터 울산 대구 등 전국 10개 혁신도시에 약 4조5000억 원이 보상금으로 풀릴 예정이다.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돈은 서울 강남지역 등으로 몰렸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김선덕 건설산업전략연구소장은 “서울 강남은 지방 자금 유입이 두드러지는 이른바 ‘전국구’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의 균형발전 정책이 또 다른 정책 목표인 집값 안정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뜻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시각이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행정도시 보상에 들어간 돈은 3조 원에 불과하고 혁신도시 등은 아직 보상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각종 개발 계획은 발표만으로도 주변 부동산 값을 끌어올리고 여기서 생긴 각종 투자 수익이 서울 강남 등지로 흘러들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이 밖에 기업의 투자 활성화를 위해 현 정부 들어 계속 유지된 저금리 정책도 주택담보 대출이 늘어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부동산시장 안정이라는 정책 목표와 충돌을 빚었다.

○ 비정규직 보호하니 일자리가 준다

“지난해 말 비정규직 보호법안이 통과되는 바람에 오히려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해고됐습니다. 현재 비정규직의 고용은 법안 통과로 더 불안해진 겁니다.”

의료연대노조 서울대병원 지부 오은영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서울대병원은 지난해 12월 31일 계약 기간이 2년이 안된 비정규직 간호사 등 10여 명에게 계약 종료를 통보했다.

올해 7월 비정규직 보호법안 시행을 앞두고 서울대병원뿐 아니라 많은 공공 기관과 일부 대기업에서 고용 기간이 2년이 안된 비정규직 직원을 해고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비정규직을 의무적으로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하는 시기는 2009년 7월부터지만 일찌감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비정규직 고용을 줄여 가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비정규직 보호 문제는 올해 30만 개 안팎으로 잡은 정부의 일자리 창출 목표 달성을 어렵게 만들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한 경제 부처 관계자는 “현 정부 양극화 해소 정책의 핵심인 비정규직 보호는 일자리를 많이 만든다는 경제 목표와 상충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일자리를 많이 만들겠다는 ‘고용률 제고’는 대통령 자문 ‘사람입국·일자리위원회’의 핵심 과제다. 그러나 같은 위원회의 또 다른 목표는 ‘노동시장의 양극화 해소 및 취약 계층의 고용 여건 개선’으로 결과적으로 상충된 목표를 동시에 추구해 온 셈이다.

○ 정책 충돌 많아지면 경제 체질 약화돼

이 밖에도 궁합이 맞지 않는 현 정부 정책들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또 정부의 기업의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한 규제완화 정책과 출자총액제한제도 등 ‘덩어리 규제’를 유지하는 정책 방향 사이의 충돌도 현 정부 내내 논란이 됐다.

현 정부에서 상극인 정책들의 정책 충돌이 발생하는 주 원인은 경제 정책의 핵심은 결국 ‘선택’에 있다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모든 정책을 임기 안에 동시에 추진하려는 욕심 때문에 이런 상황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강석훈(경제학) 성신여대 교수는 “기본적으로 경제 정책은 일관되고 통일된 ‘경제 철학’에 기초해 같은 방향으로 추진돼야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며 “지금처럼 서로 상충되는 정책이 계속 추진된다면 한국 경제의 체질은 더욱 약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넘치는 위원회… 정책 중구난방▼

현 정부의 경제정책이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문가들은 각종 위원회의 범람을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는다. 특히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정책기획위원회 등 경제 관련 대통령자문위원회가 비판의 초점이다. 대통령의 정책적 판단을 돕기 위해 구성된 자문위가 제 구실을 못한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11월 “부처 간 이해관계가 달라 정부의 통합적 정책을 만들기 어려워 각종 위원회를 만들었다”며 “참여정부에 위원회가 많아 ‘위원회 공화국’이라고도 하는데 맞다. 일만 잘하면 그만이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대통령자문위원회는 ‘정책 조정’이라는 취지와 달리 지나치게 다양한 영역의 정책목표를 제시하면서 오히려 혼선과 난맥상의 한 원인을 제공했다.

국가균형발전위원회는 행정도시, 혁신도시 건설을 핵심 과제로 추진하면서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낄 수도권을 겨냥해 ‘수도권의 경쟁력 강화방안’을 동시에 추진했다. 서울을 세계도시로, 인천을 동북아 관문도시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립(兩立)하기 힘든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쫓다 보니 관련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 사이의 갈등은 전보다 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인천 경제자유구역의 경우 경제자유구역청 설립 방향 등을 놓고 재정경제부와 인천시의회의 갈등이 폭발 직전이다.

사람입국·일자리위원회는 지난해 11월 “성장만으로는 충분한 일자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노 대통령의 지시로 수개월간의 작업 끝에 새로운 일자리 창출 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내용은 △고용을 고려한 경제·산업정책 추진 △산업 수요에 맞는 인적자원 개발체계 구축 △유연하고 안정된 노동시장 구축 등 기업과 구직자의 요구에 모두 맞춰야 하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것이었다.

대통령자문위원회 군(群)의 ‘컨트롤 타워’격인 정책기획위원회의 이정우 전 위원장과 정태인 전 위원은 대통령의 측근으로 분류되는데도 정부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공개적으로 반대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정책조정기구로서의 역할과 위상에 이미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은 상황에서 이 위원회가 전부터 추진해 오던 정책까지 혼선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바로잡습니다]

△25일자 A3면 ‘일자리 늘리자-비정규직 보호 충돌’ 기사 중 “비정규직 보호법안 시행을 앞두고 서울대병원이 계약기간 2년이 안 된 비정규직 10여 명에게 계약 종료를 통보했다”는 부분에 대해 서울대병원은 “일부 비정규직 근로자의 계약을 종료했지만 이는 비정규직 보호법안 때문은 아니다”라고 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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