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 상생 새모델 뜬다…중소기업에 무료 기술전수

  • 입력 2006년 10월 31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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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 기능장회 소속 근로자 김기탁 씨(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가 울산 북구 달천동 송재산업 지게차 덮개 용접 현장에서 제품 변형을 줄이는 용접 기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제공 현대중공업
현대중공업 기능장회 소속 근로자 김기탁 씨(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가 울산 북구 달천동 송재산업 지게차 덮개 용접 현장에서 제품 변형을 줄이는 용접 기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제공 현대중공업
《24일 오후 8시경 울산 북구 달천동 송재산업. 늦은 시간인데도 10여 명의 근로자가 공장에 남아 용접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이 회사는 지게차, 굴착기 등 건설기계장비의 부품을 제작하는 중소기업. 지게차 덮개를 용접하는 현장에 있는 한 중년 남성이 눈에 띈다. 그는 이곳 근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

“용접 부분이 일관되지 않고 들쑥날쑥해요. 제품의 두께에 따라 용접봉 두께를 달리해야 용접에 따른 제품 변형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직접 용접기를 들고 시범을 보인 다음 차례로 실습을 시킨다.

또 다른 중년 남성은 바로 옆 굴착기 운전석 바닥 용접 현장을 쭉 지켜보다 “역변형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역변형이란 용접으로 열이 가해진 제품에 생긴 변형을 바로잡는 것. 근로자들이 “제품마다 작업을 하고 있다”고 답하자 조심스럽지만 강한 어투로 말한다.

“아예 용접틀에 역변형을 주는 건 어떨까요. 그러면 제품마다 할 필요가 없어 작업 시간이 단축되고 생산능률이 크게 오를 수 있습니다.”

두 중년 남성은 현대중공업 기능장회 근로자인 김기탁(49·특수선 품질경영부) 씨와 고윤열(50·가공5부) 씨. 기능장회는 기능 분야 최고 자격증인 기능장을 획득한 현대중공업 근로자들의 모임이다.

이들은 6월부터 송재산업 근로자들에게 용접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벌써 12번째다. 이곳만이 아니다. 기능장회 근로자 30여 명이 6월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송재산업과 청호산업, 호창기계 등 울산 지역 중소기업 10여 곳을 직접 찾아 중장비부품 생산기술과 배관 제작기술 등을 전수하고 있다.

이들은 용접과 판금, 선체 건조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능장과 기술지도사 자격증을 갖춘 베테랑 근로자. 김 씨와 고 씨는 각각 올해와 2004년 선체건조 부문과 제관 부문에서 산업명장에 선정된 최고 기술자이기도 하다.

이들은 누가 시켜서 중소기업을 찾는 게 아니다. 이들은 정부나 기업의 지원 없이 스스로 중소기업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기술로 일가를 이룬 최고 기술인의 사회 환원’으로 봐 달라는 게 이들의 설명.

이들은 가만히 앉아서 중소기업의 도움 요청을 기다리지 않고 기술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을 직접 수소문해서 찾아간다. 또 기술 교육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기술 전수를 마칠 때마다 자신의 노하우를 담은 파일을 만들어 중소기업 경영진에 전달한다.

기능장회 기술지도 간사를 맡고 있는 김 씨의 파일에는 기술지도 활동 관련 보고서와 현장 사진이 100쪽 넘게 차곡차곡 정리돼 있다.

활동을 시작한 지 4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기술 전수 효과가 눈에 띄게 나타난 중소기업도 생겼다. 송재산업은 6월 이후 13.4%의 비용 절감 효과를 봤다.

송재산업 생산관리부 박상동(43) 부장은 “근로자가 대부분 30대 초반으로 경험이 적고 이직률이 높아 기술 축적이 어려웠다”며 “자신들만 생각해도 될 대기업 근로자들이 돈 한 푼 받지 않고 성심성의껏 도와줘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라고 말했다.

울산의 중소기업들 사이에 입소문이 퍼지자 이제는 중소기업들에서 먼저 연락이 온다.

10월 초에는 액화천연가스(LNG) 파이프라인 하역설비를 생산하는 동원공업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용접 근로자 2명을 보내 새로운 기술을 전수받고 싶다는 것.

김 씨는 자신이 산업명장으로 선정되는 계기가 된 기술 중 하나인 새로운 비철 용접 방식을 아낌없이 전수했다. 이들이 돌아간 뒤 동원공업 측은 아예 현장에서 전체 근로자를 대상으로 기술을 전수해 줄 것을 요청했다.

기능장회 이주형(47·해양생산부) 회장은 “제조업 발전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근로자가 모두 높은 기술력을 가질 때 가능하다”며 “현장에 나가 보니 중소기업 근로자들이 기술력이 없어 임금이 낮고 자연스럽게 이직이 늘어 기술을 축적할 시간이 없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기능장회 근로자들은 중소기업의 젊은 기술자들에게 기술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 주는 교육에도 관심이 많다. 그래서 기술 전수 과정에는 꼭 ‘인성교육’을 포함시킨다.

“젊은 근로자들이 ‘우리는 공돌이, 공순이’라는 자격지심에 시달리면 한국 제조업의 미래는 없습니다. 자신이 생산직 근로자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중소기업이 살고 제조업이 살아납니다. 그런 인식을 심어 주는 게 선배 기술인의 몫이죠.”

울산=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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