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끝모를 파업…얻은건 ‘머리띠’ 잃은건 ‘일자리’

  • 입력 2006년 9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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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오후 경북 포항시 남구 해도동 포항전문건설업 협의회 사무실. 중년 남성 30여 명이 삼삼오오 모였다. 이들은 포항전문건설업 기계분야 업체 대표들. 포항전문건설노조(건설노조)의 파업으로 두 달 넘게 일을 쉬고 있는 이들은 요즘 들어 노조원들 전화가 잦다는 이야기부터 나누었다.

“집회에 참여하는 것도 이젠 지친다고 전화를 합디다. 추석도 다가오는데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살림이 결딴날 것 같다고…. 그러면서도 지도부 눈치가 보인다고 회사에 나타나질 못해요.”

그러나 사장들은 이제 선뜻 “복귀하라”는 답을 내놓지 못한다. 전날 이 업체들의 가장 중요한 발주처인 포스코는 노조원이 없는 다른 회사와 공사계약을 했다. 이젠 사측도 어디서 일거리를 구할지 막막하다.

포항전문건설노조가 파업에 돌입한 지 석 달째, 노도 사도 벼랑 끝에 몰렸다.

▽포스코, 외부업체에 공사 내줘=지난달 31일 포스코는 경기 성남시에 본사가 있는 서희건설과 공사계약을 했다. 현재 공정 80%를 마친 상태에서 공사가 중단된 파이넥스 설비 공사를 무작정 내버려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서희건설은 비노조원과 타 지역 근로자를 중심으로 4일부터 공사를 할 예정이다. 포스코가 포항제철소 안의 공사를 포스코건설이 아닌 업체에 발주하기는 처음이다.

첨단철강생산설비인 파이넥스는 포항제철소 안에서 진행되는 34개 공사의 핵심. 포스코는 포항건설노조의 파업에 따른 파이넥스 공사 중단으로 하루 32억 원씩 손해를 보는 형편이다.

파업이 계속되면서 포항시 전체의 경제도 적잖은 타격을 받고 있다. 건설업체 직원과 건설노조원 등 5000여 명에게 매달 지급되던 300억 원 규모의 공사대금이 묶였다. 공사가 정상적으로 진행될 때면 100여 곳의 협력업체 관계자들이 매일 포항으로 찾아와 먹고 자고 하며 도시 경제의 현금 주머니 노릇을 했지만 요즘 음식점들은 굵직한 손님 구경하기가 어렵다.

▽하청 건설업체들 타격 심각=포스코건설의 공사 포기는 이 회사의 하도급을 받아 공사에 참여하던 건설업체, 특히 주력 업체인 전기 및 기계분야 70여 개 업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들 업체 대부분은 파업이 계속된 지난 2개월 동안 수입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매월 수천만∼수억 원의 고정비용을 지출해 자금난이 심각하다.

업체 대표들은 지난달 31일 임시총회를 열어 건설노조 측에 입장 표명을 요구하는 한편 집단적인 폐업을 검토했다.

건설업체의 폐업이 이어질 경우 업체 직원 1000여 명은 일자리를 잃을 가능성이 높다. 또 업체에 소속돼 포스코에서 일해 왔던 건설노조원 3500여 명의 일자리도 불투명해진다. 추석을 앞두고 대량 실직사태가 빚어질지도 모르게 된 것이다.

포항제철소 부근 식당에서 만난 50대 건설노조원은 “파업 전에 한 달 300만 원가량이던 수입이 없어져 여기저기서 꾸어 생활비를 감당하고 있다”며 “집행부 지시를 받지 않으면 현장에서 퇴출시킨다고 하니 집회에도 참여하곤 했지만 이젠 정말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노-노 갈등도 표면화=노조 지도부는 “회사가 폐업하더라도 다른 업체와 계약해 일을 할 수 있다”며 노조원들의 이탈을 막고 있지만 강경한 지도부와 현장 복귀를 요구하는 일반 노조원 사이에 차츰 대립이 불거지고 있다.

지난달 중순까지 5000명을 헤아리던 시위대 규모가 지난달 31일과 1일 열린 시위에서는 1000명 선으로 줄었다.

31일 포항 시내에서 열린 민노총과 건설노조 집회에서 상당수 노조원들은 “노사 잠정합의안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혀라”고 집행부에 요구하기도 했다. 민노총과 건설노조원 1200여 명은 1일 포항시청 앞 도로에서 집회를 열고 시에 사태 해결을 위한 중재를 요구했다. 그러나 포항시 관계자는 “노사가 서로 등을 돌린 상태에서 포항시가 특별히 중재할 부분은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시위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선은 이제 차라리 무덤덤하다. 몇몇 시민은 “일을 못하게 되면 회사도, 노조도 없는 것 아닌가”라며 “노사 충돌이 지겹도록 계속되니 이제 짜증보다 측은한 생각이 든다”며 고개를 저었다.

포항=이권효 기자 bor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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