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보험만 들면 웬만한 사고내도 처벌 면제

  • 입력 2005년 10월 31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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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여주군에 사는 최모(65) 씨는 지난해 10월 16일 오후 6시경 마을 앞 왕복 2차로 길을 걷다 차에 치여 머리를 크게 다쳤다. 최 씨는 다행히 의식을 회복했지만 지병이 있던 부인은 남편이 당한 사고의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고 당일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귀가한 가해자는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종합보험에 가입돼 있어 형사처벌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

교통사고 피해를 신속히 배상하게 하고 국민 생활의 편익을 증진한다는 목적으로 1982년부터 시행된 ‘교통사고처리특례법(교특법)’이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

○ “보험회사가 알아서 해줄 것”

김미영(가명·24·여) 씨는 지난해 5월 경북 경주시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이 마비되는 중상을 입었다. 25t 트럭이 앞에 정차한 차를 피하려다 길가에 서 있던 김 씨를 덮친 것. 운전사는 병원에 딱 한 번 찾아온 후 완전히 발을 끊었다.

교통사고 관련 소송을 전문으로 하는 한문철(韓文哲) 변호사는 “횡단보도 근처에서 차에 치이면 정신을 차리고 손을 뻗어 횡단보도를 짚어야 나중에 가해자 얼굴이라도 볼 수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라고 전했다.

이처럼 운전자가 ‘사고가 나도 보험으로 처리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특법 제3조 2항 및 4조 때문.

교통사고로 인한 손해배상금 전액을 보상하는 보험 또는 공제에 가입하면 뺑소니, 음주 운전, 과속, 횡단보도 사고 등 11가지 중대 교통법규 위반이거나 피해자가 사망하지 않는 한 기소를 면제한다는 내용이다. 피해자가 식물인간이 될 정도로 심하게 다쳐도 합의한 것으로 간주한다.

교특법이 시행된 1982년 이후 몇 년간 교통사고는 큰 폭으로 증가했다. 자동차 보유 대수가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고를 내면 안 된다는 운전자의 인식이 이전에 비해 크게 약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 보험이 형사상 면책 수단인가

교특법은 24년 전인 1981년 12월 31일 제정됐다. 교특법 1조는 ‘피해의 신속한 회복’과 ‘국민 생활의 편익 증진’이 제정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제정 당시 다른 의도가 있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고려대 김일수(金日秀·법학) 교수는 “교특법은 당시 추진 중이던 고급 공무원의 자가운전 계획을 뒷받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며 “공무원이 교통사고로 형사처벌을 받으면 신분상 불이익을 받는데 이를 피해 갈 수 있는 장치를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분명한 것은 원래 보험은 교통사고로 인한 피해자의 손실을 보전하기 위한 수단인데 한국에선 교통사고 범죄에 대한 형사상 면책 수단이 돼 버렸다는 점이다.

헌법재판소는 교특법 특례 조항이 헌법의 평등원칙, 과잉금지원칙 등에 위배된다는 취지의 헌법소원에 대해 1997년 1월 기각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재판관 9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5명이 위헌 의견을 냈다. 위헌 결정은 6명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녹색교통운동이 지난해 실시한 설문조사에선 교특법을 폐지하거나 개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80% 이상이었다. 이 단체는 다음 달 공청회를 열고 교특법 폐지 또는 개정 문제를 공론화할 계획이다.

물론 일각에선 반대 의견도 있다. 교특법을 없애면 운전자가 언제든지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는 위험에 노출돼 범법자나 전과자를 양산할 수 있다는 것.

○ 보험사기 등에도 악용

형사처벌 가능성이 낮은 점을 악용해 일부러 사고를 내고 보험금을 타내는 보험사기도 해마다 늘고 있다.

조직폭력배 장모(30) 씨 등은 병원 사무장, 보험설계사 등과 짜고 교통사고를 낸 뒤 피해를 부풀리는 등의 수법으로 1998년부터 2004년까지 총 256차례에 걸쳐 20여억 원의 보험금을 타냈다가 최근 덜미를 잡혔다.

이런 고의적 교통사고는 2001년 585건에서 2004년에는 2203건으로 급증했고, 보험금도 108억 원에서 323억 원으로 늘었다.

자동차보험 가입자들이 형사처벌 면제 특혜를 받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비싼 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금융감독원 정준택(鄭埈宅) 특수보험팀장은 “사고를 냈을 때 보상 범위는 1억∼3억 원 한도면 충분하지만 교특법 혜택을 받기 위해 대부분의 가입자가 ‘무한보상 옵션’을 선택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자동차 종합보험 가입률은 전체 등록 차량의 87%에 이른다.

○ 한국 외에는 비슷한 입법 사례 없어

종합보험 가입과 형사처벌을 연계시키는 법은 전 세계에서 한국에만 있다. 일반적으로 보험으로 민사 문제는 해결되지만 형사처벌은 따로 받게 돼 있다.

영국에선 교통사고가 발생했을 때 피해자에게 피해액 전액을 배상하는 보험에 모든 운전자가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하지만 이 보험은 오직 민사상 손해배상을 위한 장치다. 한국처럼 가해자를 형사처벌하지 않는 혜택은 없다.

미국은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예컨대 음주운전을 하다 사고가 나면 피해자가 본 손해와 상관없이 가해자의 사회적 지위, 재산 상태 등을 고려해 가해자가 타격을 받을 수 있는 수준의 손해배상액을 결정한다.

정부도 교특법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

건설교통부는 행정자치부, 법무부와 협의를 거쳐 내년까지 교특법을 폐지하거나 보완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제5차 교통안전 기본 계획을 마련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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