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 前금감위원장 “사람들 심리 위축…희망 줘야”

  • 입력 2004년 8월 5일 19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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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금융감독위원회와 금융감독원 체제는 애초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져 있었다. 잠복하고 있던 갈등 요소가 감사원의 카드 특감 때문에 터져 나왔다. 나는 예전부터 언젠가 이런 사태가 오면 물러나야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인생은 연극’이란 말을 남기고 ‘야인(野人)’으로 돌아간 이정재(李晶載·사진) 전 금감위원장을 4일 밤 만났다. 지난달 31일 이 전 위원장이 갑작스레 사의를 표명한 날부터 시작해 그의 자택을 찾은 지 세 번째 만이었다. 그가 금감위원장 사퇴 후 기자를 ‘독대(獨對)’한 것은 처음이다. 이 전 위원장은 잠시 망설이다 문을 열어주었다. 캔맥주를 마시며 대화는 밤 10시부터 2 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는 금융 감독체계 개편, 갑작스러운 사임 이유, 공직을 떠난 소회 등을 담담하게 털어놨다.

사임 이유부터 물어봤다.

“(감독체계 개편과 관련해) 어느 쪽 입장도 대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물러나는 것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해 금감위의 한 고위관계자는 다른 해석도 내놓았다.

“이 전 위원장은 이정우(李廷雨)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이 삼고초려 끝에 모셔왔다. 원래부터 마음을 비우고 책임감만 가지고 직을 수락했다. 그런 만큼 카드특감에서 비록 취임 전의 일이지만 감독책임 등이 지적되자 이를 자신이 짊어지려 했다.”

―마지막 공직이었을 수도 있는데….

“공직에서 물러나면 흔히 금단(禁斷) 현상이 온다. 대부분은 돌아가려는 욕구를 강하게 느끼고 국회의원이라도 하려 한다. 특히 몸담았던 조직의 후배들에게 서운한 일을 당하면 더 그렇다. 하지만 나는 애초부터 그런 욕심이 없었으니까…. 다만 이임사 때 조직 내부 얘기를 하려다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부터 쏟아졌다. 그만두니까 식구들이 너무 좋아한다.”

옆에 있던 부인 박금옥씨가 거들었다. “사흘 만에 얼굴색이 돌아왔어요. 그 전에는 얼굴색이 까맣게 변해 큰일 나는 줄 알았어요.”

―임원들과의 마지막 점심 식사 자리에서 ‘인생은 연극’이라는 말을 남겼는데….

“관직에 있으면 누구나 지위 역할에 따른 임무를 수행한 뒤 끝나면 떠나야 한다는 의미다. 흔히 사람들은 주변에서 자신의 인품이나 능력을 존경하는 줄로 착각한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자리를 대접할 뿐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금융 감독체계 개편 문제를 물어봤다.

“재정경제부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금감위 감독 규정으로 대치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또 제3의 기관에서 (금감위와 금감원) 양쪽 다 만족할 수 있는 방향으로 기구 개편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즉 신용카드사 등 금융회사의 건전성과 관련해 여신전문업법, 은행법 등에 마련된 시행령과 규칙을 국무회의 의결이 필요 없는 금감위 감독규정으로 대치해 시장 변화에 즉시 대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는 것.

―카드사태로 마음고생이 심했을 텐데….

“근본적인 해결책은 내수 활성화밖에 없다. 경기를 살리기 위해 이제는 뭔가 희망을 주는 방향에 힘을 모아야 한다. 사람들의 심리가 요즘 너무 위축돼 있다.”

질문이 이어지자 이 전 위원장은 빙그레 웃었다. “먼 훗날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 할 일은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다. 고향(경북 영주시)에도 한 번 내려가 봐야 하고….”

배극인기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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