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기업, '빚쟁이'에서 '파트너 관계'로

  • 입력 2004년 3월 29일 14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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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조류독감의 영향으로 부도위기를 맞았던 A닭고기 가공업체의 사장은 이렇게 털어놓았다. 그는 "사정이 좋을 때는 서로 돈을 빌려주겠다고 덤비더니 힘들어지니까 당장 '우리 돈부터 내 놓으라'며 경쟁적으로 대출을 회수해갔다"고 말했다.

은행들의 이러한 태도는 기업과 은행 사이에 깊은 불신의 골을 남겼다. 시장경제가 활력을 찾기 위해 꼭 필요한 '기업가 정신'과 금융의 진정한 파트너 관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최근 뿌리 깊은 은행의 대출관행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빚을 받으려면 기업을 살려라="대출금을 어떻게 갚나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갑자기 은행에서 '컨설팅'을 받아보겠느냐는 제의가 왔습니다."

1998년 말 서주아이스우유를 인수한 빙과류 제조업체 효자원의 정용택(鄭龍澤) 사장. 정 사장은 직원 수를 4분의 1로 줄이는 등 구조조정을 했지만 적자는 5년째 계속돼 원리금 상환에 허덕여야만 했다.

그러던 중 올해 1월 하나은행이 뜻밖의 제안을 해온 것. 이 은행의 컨설팅팀은 3주간 실사작업 끝에 '웰빙(Well-being) 추세'에 발맞춰 고급아이스크림 시장을 겨냥한 새로운 브랜드 도입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은행은 한 발 더 나아가 매년 20억원의 원리금을 갚기로 돼 있는 채무상환계획을 수정해 연간 원리금 상환액을 8억원으로 낮춰줬다.

정 사장은 "이제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기 위한 경영전략을 짜고 있다"면서 "기업을 살리기 위해 은행과 함께 고민하는 과정에서 은행을 신뢰하게 됐다"고 말했다.

효자원에 대한 컨설팅은 최근 하나은행이 기업의 부실채권 관리방식을 '무조건적 회수'에서 '기업회생을 통한 대출 건전화'로 바꾼 뒤 컨설팅을 해준 첫 번째 사례.

하나은행 이화수(李和洙) 경영컨설팅팀장은 "기업에 대한 은행의 적극적 컨설팅은 기업에는 회생의 기회를 주고 은행은 건전한 기업고객을 늘리는 '윈-윈 게임'"이라고 설명했다.

▽기술력과 경영자의 의지가 최고의 '담보'=자동차 실린더 헤드 생산업체인 천양산업의 정평진(鄭坪鎭) 사장은 2002년 5월 경영을 합리화하기 위해 GM대우에 같은 부품을 납품하는 중소기업을 인수합병하기로 결심했다. '규모의 경제'를 통해 도약을 꿈꿨던 것.

역시 자금이 문제였다. 마땅한 담보를 제공하지 못한 그에게 대부분의 은행들은 대출을 거절했다. 그러나 이 회사의 기술력을 높이 평가한 우리은행 기업영업전략팀은 계약대금 7억원을 담보 없이 신용대출해주고 운영자금으로 쓰도록 어음 15억원도 유리한 조건으로 할인해줬다.

은행의 적극적 지원은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이후 천양산업은 GM 다임러크라이슬러 등 세계 유수의 자동차 업체에 부품을 납품하면서 2001년 68억원이던 매출액이 2003년 231억원으로 급증했다.

천양산업에 대한 여신지원을 맡았던 우리은행 김기주(金起周) 차장은 "은행 내에서 일부 반대의견이 있었지만 공장을 방문해 '오너'의 의지와 기술력을 확인하고 소신껏 대출해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말했다.

우리은행의 이 같은 관행은 삼성그룹 출신인 황영기(黃永基) 은행장의 취임으로 가속화할 전망이다. 황 은행장은 최근 기자들과 만나 "기업을 죽이는 저승사자가 아닌 '기업을 살리는 은행' 소리를 듣고 싶다"면서 "일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기업에 대해 자금지원이나 출자전환 등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국금융연구원의 한상일(韓相壹) 연구위원은 "외환위기 이후 인수합병으로 은행들의 규모가 커지면서 은행과 중소기업의 연결고리가 크게 약화된 것이 사실"이라며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은행들은 우량 중소기업과 상생(相生)의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창원기자 cha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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