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돈 이젠 끊자]<中>정치권 自淨외면

  • 입력 2003년 10월 29일 18시 54분


코멘트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왼쪽)와 이재오 사무총장이 29일 오후 당사에서 여야를 가리지 않고 불길이 번져가고 있는 대선자금 문제 등에 관해 숙의하고 있다. -서영수기자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왼쪽)와 이재오 사무총장이 29일 오후 당사에서 여야를 가리지 않고 불길이 번져가고 있는 대선자금 문제 등에 관해 숙의하고 있다. -서영수기자
“맑은 물에는 물고기(정치인)가 살 수 없다.”

10여년간 국회 정치개혁 협상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던 한 국회 관계자는 정치자금과 관련한 개혁 입법이 논의만 무성하다가 결실을 보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비유했다. 정치를 하려면 합법적인 후원금만으로는 충당하기 힘들 만큼의 큰돈이 필요하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검은돈’의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치인도 유권자도 원치 않는 정치자금 개혁?=한 율사 출신 초선의원은 ‘검은돈’을 요구하는 3가지 요인으로 돈 먹는 선거구조와 정당구조, 그리고 유권자들의 의식을 꼽았다.

그는 “선거에서 돈을 뿌리다 재판에 걸려 의원직을 잃은 사람이 재보선에 다시 나오면 또 찍어주는 유권자들도 ‘검은돈’ 거래를 부추기는 공범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당도 마찬가지다. 방대한 정당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 한달 경상비만도 20억원 이상이 소요되는 현실이다 보니, 최대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온갖 탈법 편법 모금을 마다하지 않게 된다.

민주당이 7월 23일 발표한 대선자금 명세에 따르면 100만원 이상 고액 기부 342건 중 104건 50억여원은 법인 또는 단체가 후원하고 영수증은 개인 명의로 끊어준 것으로 돼 있다. 상당수의 기업 또는 단체 기부자들이 기부 한도액을 초과하는 바람에 개인 명의로 변칙 기부한 것이다.

열린우리당 이상수(李相洙) 의원이 SK에서 받은 후원금 25억원 중 2차로 건네진 10억원도 마찬가지다. 이 의원은 SK 임직원 33명의 명단을 넘겨받은 뒤 이들에게 민주당 제주도지부 후원회 영수증을 발급해 주는 변칙을 썼다.

수표와 통장을 통해 거래된 것은 그나마 투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금이나 달러 등으로 건네진 거액의 검은돈은 누군가가 발설하지 않는 한 추적이 불가능하다. 검사 출신의 노관규(盧官圭) 민주당 예결위원장은 “계좌추적은 수표와 통장으로 거래될 때만 가능하며 현금 거래에는 무용지물이다”고 말했다.

법사위의 한 의원은 “여야 정당이 겉으로는 완전 선거공영제에 태산이라도 울릴 듯 한목소리를 내면서도 번번이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것은 실제 공영제가 됐을 경우 ‘실탄’을 모금할 길이 막혀 ‘빈사’ 상태에 놓이지나 않을까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정치자금법 개정은 늘 후순위=이 때문에 정치자금의 전모를 솔직하게 공개하고 검증 받기를 정치권에 기대하는 것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실제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대선 직후인 지난해 12월 말 국회 정치개혁특위를 올해 초부터 가동해 국회법 인사청문회법 선거관계법 정당법 등 각종 정치개혁법안과 부패방지법 개정을 논의키로 합의한 바 있다. 그러나 이후 협상에서 국회법과 인사청문회법의 경우 권력기관장 인사청문회를 실시하는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결실을 거둔 반면 정치자금법 개정 논의는 아직도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정개특위는 여론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해 말로는 이번주 초부터 다시 회의를 열어 속도를 낼 것을 다짐하고 있다. 그러나 목요상(睦堯相) 정개특위위원장은 “우선 내년 총선을 앞두고 시급한 선거구와 관련한 기본 합의 도출이 선결과제”라고 말했다. 정치자금 관련 논의는 뒤로 밀릴 수도 있음을 예고하는 얘기다.

15년간 관련 분야에서 일해온 한 국회 관계자는 “정치자금 기부자 명단 공개를 의무화하거나 아예 선관위로 정치자금 모금 창구를 일원화하는 등 획기적인 법 개정이 없다면 음성적인 정치자금의 유통을 차단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

정용관기자 yongar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