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소비 현장점검,“앞날 불안… 겁나서 돈 못써요”

  • 입력 2003년 10월 15일 17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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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 임형욱씨(33·서울 성북구 정릉동)는 며칠 전 대학동창 모임에 갔다가 달라진 분위기에 놀랐다. 올해 초만 해도 1차 고기, 2차 맥주, 3차 노래방까지 갔었는데 이번에는 퓨전삼겹살에 소주를 먹는 것으로 1차를 길게 하고 끝냈다. 예전에는 서로 “내가 살게”하며 나서던 것도 사라져 누구도 나서서 내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임씨는 “경기가 언제 좋아질지 모르고 구조조정이다 뭐다 분위기가 흉흉하니 겁이 나서 돈을 쓸 수가 없다”고 말했다.

임씨만이 아니다. 요즘 돈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지갑을 꼭 닫고 있다. 작년 말부터 내리막길을 걷던 소비심리가 최근 들어 좋아지기는커녕 더 얼어붙고 있다.

현대백화점 서울 압구정 본점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매출액이 전년에 비해 2% 줄었다. 그런데 올해는 1∼9월 매출이 작년 동기에 비해 2.5% 줄었다. 이 백화점 김정선 차장은 “모든 백화점이 전년에 비해 매달 5% 이상씩 매출이 줄고 있다”면서 “외환위기 때는 금리가 높아 돈 있는 사람들은 여유가 있었는데 요즘은 금리도 낮고 마땅히 투자할 곳도 없으니 무조건 아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얼어붙은 소비심리=서민 대상 업종은 더욱 찬바람을 맞고 있다. 98년 창업해 호황을 누렸던 저가 의류 전문 쇼핑몰 밀리오레는 9월 명동점 주차타워를 판 데 이어 대구점과 광주점을 매각하겠다고 밝혔다. 올해 매출액은 1999년의 약 3분의 1로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의 소비 침체는 경제 전문가들이 놀랄 정도. 통계청이 14일 발표한 ‘9월 소비자전망조사’에서는 현재의 경기·생활형편에 대한 소비자 평가지수가 59.9(기준치 100)로, 이 통계가 나오기 시작한 98년 11월 이후 최악으로 나타났다.

금융연구원 박종규 연구위원은 “9월 소비자 지수가 예상보다 크게 나빠져 당혹스럽다”면서 “가계 부채가 해결되지 않고 실질소득이 줄어 소비 위축이 심해진 것 같다”고 분석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자동차 TV 냉장고 에어컨 등 내구재 소비는 전년 동기에 비해 10.0∼28.3% 줄었다. 2년 동안 경제성장률보다 높았던 민간소비 증가율은 작년 4·4분기(10∼12월)부터 급락해 올해 2·4분기(4∼6월)에는 ―2.2%를 나타냄으로써 경제성장률 하락을 주도한 것으로 분석됐다.▽있는 사람들은 해외로=일부 부유층에서는 국내보다는 해외로 나가 돈을 쓰거나 고가 수입품을 소비하는 경향도 나타난다. 서울 강남에 사는 사업가 L씨(40)는 요즘 일본이나 태국으로 ‘원정 골프’를 간다. 일본 나가사키나 중국 상하이로 가면 한국보다 조건이 훨씬 좋은데다 항공료와 숙박비를 합해도 100만원 조금 넘는다는 것. 강남에서는 수입자동차나 골프 관련 수입상품 매출도 꾸준히 늘고 있다.

김성엽 하나은행 분당 백궁지점장은 “부유층은 외환위기를 거치며 자산이 1.5∼2배로 늘어난 사람이 많다. 최근 부유층 소비는 크게 줄지 않았으나 중산층과 젊은이들의 소비가 급격히 줄었다”고 말했다. 더구나 중산층들까지 자녀 연수 등으로 해외 소비가 늘면서 상대적으로 국내 소비는 더 줄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정문건 전무는 “해외 경기가 회복되고 수출도 호조를 보이지만 내수가 위축돼 경제가 살아나지 않고 있다”면서 “정책적 고려가 없다면 소비 위축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정 전무는 신용불량자의 채무조정을 본격화하고, 고용 및 투자를 촉진할 수 있는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박 용기자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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