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하기 힘든 나라]<2>反기업 정서 왜 생겼나

  • 입력 2003년 8월 18일 18시 45분


코멘트
《“SK글로벌이 (대형 기업비리의) 마지막이길 바랐는데, 현대그룹 비자금 사건까지 터졌으니 국민들이 기업을 어떻게 보겠는가.”

대한상의 박용성(朴容晟) 회장은 “‘정경유착은 더 이상 없다’고 큰소리쳤는데 이제 그런 말도 못하게 됐다”며 기업을 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더욱 따가워질 것을 걱정했다. 정경(政經)유착만큼 기업 이미지를 나쁘게 만드는 것은 없다고 그는 믿고 있다. 비자금을 조성하고, 반대급부로 특혜를 받은 것이 사실인 만큼 반(反)기업 정서 확산의 일차적 책임은 기업에 있다는 얘기다.

기업인들은 “기업이 국민에게 사랑받으려면 기업인이 먼저 변화해야 한다”고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한국적 현실에서 권력과의 유착은 피할 수 없었다”며 “기업에 분명 잘못이 있지만 이를 이유로 경제계 전체를 부패의 온상인 것처럼 과장하려는 사회 분위기도 문제”라고 항변한다.》

▼관련기사▼

- <1>한국 땅 떠나는 기업들


▽권력과의 유착=“정부 주도의 고도성장기에 생존한 한국의 기업치고 문제가 없는 곳은 사실상 없다. 선진국의 기업들도 초기 자본축적 과정에서는 많은 도덕적 흠결을 갖고 있었다.”(명지대 경제학과 조동근·趙東根 교수)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 비자금사건은 정경유착의 뿌리 깊은 고리를 잘 보여준 사례다. 현대그룹도 2000년 4월 총선을 앞두고 2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 권노갑(權魯甲) 전 민주당 고문에게 전달한 것으로 검찰 수사결과 드러났다.

5억달러의 대북 불법송금, 200억원대 비자금을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에게 전달한 일 등은 결국 정몽헌(鄭夢憲)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을 죽음으로 내몰기까지 했다.

연세대 경제학부 정창영(鄭暢泳) 교수는 “80년대 이전까지는 국가가 주력산업을 선택해 조세와 금융을 통해 직접 자원을 배분하는 방식이었으며 기업들은 이런 상황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와 거리를 두라는 것은 기업이 이윤추구 조직이기를 포기하라는 주문과 같다는 것.

반면 ‘해외에서는 한국의 고도성장 모델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한국형 개발 모델의 장점도 많다’(인천대 이찬근·李贊根 교수)는 주장도 있다. 물론 이제는 시장이 국제화 개방화되면서 기업도 변해야 하고, 실제로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얘기다.

정경유착 외에도 한진 현대 통일 등 일부 재벌그룹의 탈세, 편법증여 및 상속, 대우그룹 및 SK글로벌의 분식회계, 총수의 전횡, 현대전자 주가조작사건 등 기업의 잘못은 광범위하다. ‘진승현-정현준-이용호 게이트’로 이어지는 젊은 벤처기업인들의 정관계 로비사건도 반기업 정서 확산에 기름을 부었다.

▽정권이 반기업 정서 부추겨=기업이 가진 원초적 취약성을 권력은 잘 활용했다. 많은 정권들이 집권초기 ‘개혁성’을 입증하기 위해 기업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기업의 약점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

“기업과 기업인의 비리를 폭로함으로써 자신의 도덕적 우위를 강조하고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려 했다. 정통성이 결여된 정권일수록 이런 경향은 심했다. 권력은 이 과정에서 ‘경제계 길들이기’라는 부수효과까지 누렸지만, 국민들의 반기업 정서도 함께 증폭되는 부작용을 낳았다.”(메릴린치증권 이원기 전무)

정통성이 취약했던 전두환 정권은 집권 직후 주요 공직자를 부정축재혐의로 사법처리하면서 그들의 부정축재를 도왔다는 이유로 기업인들을 몰아붙였다. 80년대 행해진 수차례의 부실기업 정리 중 정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것이 거의 없었고, 투자조정이란 명분으로 특정산업에 진출하는 기업의 수를 조정하는 것도 정부 몫이었다.

김영삼(金泳三) 정부는 개혁의 슬로건으로 “문어발을 잘라야 한다”고 했고 김대중(金大中) 정부도 재벌 때리기에 박차를 가했다.

전남대 경제학부 김영용(金永龍) 교수는 “기업인을 범죄자 취급하는 분위기에선 새로운 투자는커녕 기업의욕을 떨어뜨리기 일쑤”이라며 “학문적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반기업 정서 확산에 정부 역할이 크다”고 말했다.

삼성의 한 고위 관계자는 “한국에선 기업이 이윤을 내지 못해서가 아니라 정부정책의 타깃이 되거나, 사회여론이 나빠서 문을 닫은 경우도 많다”며 “항상 사회 여론에 조심스럽다”고 털어놨다.

▽검증 시스템의 부재(不在)=한국에선 일부 기업의 잘못 때문에 경제계 전체가 부도덕한 집단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미국에서도 엔론 월드컴 등 회계부정사건이 잇따라 터졌지만 이로 인해 미국 기업 전체가 매도당하지는 않았다.

좋은 기업과 나쁜 기업을 가려내는 사회적 검증시스템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한국에서는 외부 감사나 신용평가가 엄정하지 못한 데다 자본시장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아 불량 부실기업을 가려내는 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정권과의 친소(親疎) 관계에 따라 특혜를 얻거나, 피해를 보는 사례가 적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사법적 잣대를 자의적으로 적용, 밉보인 놈 운 나쁜 놈이 당하는 풍조도 만연했다.

기업의 건강성을 유지·회복하는 사회 시스템이 미비한 탓에 기업으로서는 도덕적 보완작업을 할 유인(誘因)이 크지 않았으며 반기업 정서를 개선할 뾰족한 방법도 없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의연구소는 91년 ‘경제정의 기업상’을 제정, 윤리경영을 실천하고 있는 기업을 선정해 13년째 상을 주고 있다. 이 연구소의 위평량(魏枰良) 국장은 “한국 자본주의가 건전하게 발전하려면 국민으로부터 사랑받고 존경받는 기업상(像)을 정립해야 한다”며 “올바른 기업에 대해서는 칭찬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이범일(李範一) 경영전략실장은 “국민경제에 기여하는 것 없이 자원만 낭비하는 기업은 욕먹어 마땅하지만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인정받는 기업은 칭찬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강운기자 kwoon90@donga.com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털면 먼지” 총수들 줄줄이 쇠고랑▼

기업을 감시하는 사회 시스템이 미비했던 고도성장기를 거쳐 온 대기업치고 ‘털어서 먼지 안 날’ 곳은 거의 없다. 정권은 이를 이용해 기업의 비리를 다스리는 방식으로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기업인들은 비리 혐의자로 지목됐다. 기업과 기업인을 비리의 본산쯤으로 보는 반기업 정서는 이렇게 국민에게 뿌리를 내렸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집권 직후 고 이병철(李秉喆) 삼성그룹 회장을 비롯해 매출액 상위 기업 11명의 기업주들을 부정축재자로 지목해 연행했다. 그러나 얼마 뒤 이 회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업주들은 풀려났고 빈곤 탈출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박 대통령은 70년대 이후 일관되게 재벌육성 기조를 유지했다.

역시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全斗煥) 당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은 1980년 봄 고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 김우중(金宇中) 전 대우그룹 회장을 불러 대우자동차와 현대의 창원중공업(현재의 두산중공업)을 맞바꿀 것을 강요했다. 국제그룹이 해체된 것도 양정모(梁正模) 전 회장이 전두환 대통령의 눈 밖에 났기 때문이라는 것이 재계의 정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때에는 정부가 대기업의 중복투자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노 대통령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는 선경그룹(현 SK그룹)에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넘겨줘 특혜논란을 빚었다.

김영삼(金泳三) 정권 초기였던 95년 말에는 5, 6공화국 비자금 파문으로 대기업 총수들이 줄줄이 법정에 서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또 정주영씨가 92년 대선에서 김 대통령에 맞서 후보로 출마한 죄로 현대그룹은 문민정부 내내 복지부동하며 지내야 했다.

외환위기 직후 취임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외환위기의 가장 큰 이유를 재벌기업들의 무분별한 중복, 과잉투자에서 찾았다. 정부주도로 빅딜(대규모 사업교환) 등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LG그룹은 반도체 사업을 포기했다. 삼성그룹도 자동차 사업을 포기했으며 이건희(李健熙) 회장은 사재 2조원을 내놓기로 약속했다. 또 수십조원의 분식회계 사실이 드러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해외로 나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DJ 정권은 후반기 대북정책을 주도한 현대그룹과 ‘특수 관계’를 맺었다. 이 과정에서 정치자금 수수 등 비리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면서 현대그룹의 이미지는 국내외에서 먹칠을 당했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대통령직인수위 시절부터 재벌개혁을 핵심과제로 제시하며 재계와 긴장수위를 높였다. 때마침 검찰을 통해 터져 나온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으로 최태원(崔泰源) SK㈜ 회장은 구속되고 손길승(孫吉丞) SK그룹 회장도 법정에 서야했다.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