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브랜드]한송이 '브랜드'를 피우기 위해…

  • 입력 2002년 4월 8일 17시 19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의 시 ‘꽃’ 중에서)

신제품이나 회사 이름을 지어주는 ‘네이밍’ 전문업체 인피니트의 문행천 팀장은 마음에 드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면 이 시구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름’을 불러 ‘꽃’을 만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조선맥주(하이트맥주의 전 이름)가 회사의 운명이 걸려 있다며 인피니트에 신제품 ‘네이밍’을 의뢰, ‘하이트’라는 이름이 탄생하기까지의 비화 하나.

당시 조선맥주는 통상적인 네이밍 기간보다 짧은 4주 안에 이름을 지어줄 것을 요구했다. 보통 3, 4명이 한 조가 되지만 문 팀장을 포함해 10명이 투입됐다. ‘지하 암반수 깊은 곳에서 뽑아낸 맑고 깨끗한 맥주’라는 것을 표현해 달라는 것이 주문이었다.

팀원들은 회사 ‘발상실’에서 모여 토론을 거듭했으나 무릎을 칠 만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팀원들은 맥주 이름을 짓는 만큼 맥주를 마시며 논의를 계속했다. 국산과 수입 맥주를 가리지 않고 마시며 브레인 스토밍을 거쳤다.

2주일이 지났을 무렵 지하 150m 암반수를 뽑아내려면 물을 ‘높이’ 끌어올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하이트(HITE)’의 모태격인 ‘HEIGHT’가 나타나자 병에 새길 수 있는 글자수 제한으로 4자로 줄이기로 했다. ‘하이트’는 뭔가 기분을 ‘높이’ 끌어올린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좋았다.

하이트와 함께 고객에게 건넨 7개 가운데 결국 ‘하이트’가 제품명으로 선택되었고 시장에 나온 하이트는 승승장구하며 시장점유율 1위를 빼앗았다. 팀원들은 ‘이름을 지어 꽃이 되어 다가온’ 맥주를 마시며 ‘네이미스트’로서의 보람과 기쁨을 만끽했다.

역시 ‘이름’값이 큰 요인이 되어 미과즙 음료시장을 제패한 롯데칠성의 ‘2% 부족할 때’ 이야기.

‘워터 이즈’ ‘워터 C’ ‘나만의 물’ ‘수채화’ ‘조이’. 네이밍 전문업체 브랜드메이저가 롯데로부터 네이밍을 의뢰받고 최종적으로 추천한 이름들이다. ‘2%’라는 표현은 없었다. 브랜드는 크게 이름과 로고 디자인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로고 디자인회사가 ‘체내 수분이 2% 부족할 때 갈증을 느낀다’는 점에 착안, ‘2%’를 디자인에 넣겠다고 통보해왔다. 롯데칠성측과 네이밍팀원들은 순간 ‘이거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만 ‘2%’만으로는 법률적 권리 확보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진통 끝에 ‘2% 부족할 때’로 결정됐다.

네이밍업체들은 이름 하나를 짓기 위해 수백 개의 초안을 만든 뒤 몇 개로 압축해 고객사에 추천하고 다시 고객사와 치열한 의견 조율을 거친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새로운 이름이 탄생한다.

인피니트가 ‘하나은행’ 이름을 지을 때 얘기. ‘하나은행’과 ‘아카시아은행’ 두 개가 마지막까지 남았다. 그런데 ‘하나’는 대부분 한자 이름을 쓰던 관행과 달리 한자가 전혀 없는데다 ‘유치원 이름 같다’ ‘여자아이 이름 같다’는 등 반론이 거셌다. ‘아카시아’는 상큼한 느낌은 있지만 ‘아카시아는 번식력이 너무 좋아 다른 나무의 생장을 막는 못된 특징이 있다’는 등이 단점으로 거론됐다.

결국 ‘손님의 기쁨 그 하나를 위하여’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참신성과 친절로 고객서비스를 다하겠다는 취지가 덧붙여져 ‘하나은행’이 낙점을 받았다.

브랜드메이저가 1998년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의 합병으로 탄생한 ‘한빛은행’의 이름도 지었다. 국민 공모안을 거쳐 제시된 이름은 무려 12만개. 120개 60개 30개 등으로 축약해 ‘한빛은행’ ‘마이뱅크’‘우리은행’ ‘드림은행’ ‘홍익은행’ 등 5개가 결선에 올랐다가 ‘큰 빛’ ‘유일한 빛’ 등의 의미를 내포한 ‘한빛’으로 최종 결정됐다.

95년 경비업체인 ‘한국안전시스템’을 ‘에스원’으로 바꿀 때는 연세대 이화여대 등의 우리말 동아리 학생들의 아이디어도 빌렸다. 결국 ‘블루벨’ ‘파수넷’ ‘에스넷’ ‘하이캅’ 등이 떠올랐다. 결국 ‘안전제일(Security No.1)’과 모회사인 ‘삼성(Samsung) No.1’ 등의 의미가 축약된 ‘에스원(S1)’으로 결정됐다.-

인피니트 문팀장은 “회사 이름을 몇 개 지어가면 ‘회사 사주’를 본다면서 점을 보러가는 사람들도 있다”며 “디자인은 약간 바꿀 수 있지만 이름은 한 번 지으면 바꾸기가 어려워 피를 말리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이자녹스’ ‘OK 캐쉬백’ 등의 이름을 지은 네이밍업체 메타브랜딩의 양문성 이사는 “제품이나 회사 이름은 우연한 착상이 단서가 될 수도 있지만 제품과 회사에 대한 과학적이고 치밀한 분석, 수요층에 대한 철저한 시장조사, 유사 상표가 없는지 등에 대한 법률적 검토 등을 거친 매우 체계적인 전략과 분석의 결실”이라고 말했다.

구자룡기자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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