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시장 파헤친다/'철옹성 담합']수입기름 팔면 협박

  • 입력 2000년 6월 26일 19시 34분


《“노선별로 T사(석유수입사) 등의 폴 S/S(Service Station·주유소) 전후의 주유소는 이들과 동일한 가격으로 대응할 것.” “저장탱크 봉쇄는 수입업자의 시장진출 억제를 위한 정유사 공동의 Needs(필요)가 크므로 소요비용 분담이 가능. 임차나 지분매입은 여론악화 가능성을 고려, 제3자를 통해야 함.” 국내 정유4사가 98년 12월 29일 마련한 ‘석유수입업자의 국내시장 진출 억제를 위한 저장탱크 봉쇄방안’과 이들 정유사의 유통질서확립대책반이 올 2월 8일 작성한 ‘주간실적 및 계획’ 등 보고서 내용들이다. SK, LG정유, 현대정유, S-Oil(구 쌍용정유) 등 정유사들이 수입사의 시장 진입을 막기 위해 ‘강고한 연대’를 구축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정부는 97년 1월 유가자유화, 98년 7월 석유정제업의 외국자본 참여비율 제한 철폐 등 석유시장 개방을 통해 정유업계의 구조조정을 추진해 왔으나 그 이면에서 이같은 담합행위는 계속되어 왔던 셈이다. ‘본보 취재팀이 입수한 정유4사의 비밀보고서 3건을 뜯어보면 이들이 최소한의 ‘상도의(商道義)’마저 망각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요지경 담합’의 실태〓지난해 말 작성된 ‘유통질서확립대책반 운영지침’에 따르면 정유4사는 제주를 제외한 서울 경기 등 전국 13개 지역에서 담합활동을 펴왔다. 이 대책반의 총괄운영은 각 정유사 영업담당 임원들이, ‘지역단’은 각 정유사의 해당지역 지사장들이 운영을 맡아왔다.

전북지역 유통질서확립대책반이 1월 11일 작성한 보고서는 일반대리점상 K씨, Y씨 소유의 주유소들이 ℓ당 1201원(휘발유), 584원(경유)의 가격을 유지하자 13일 정오까지 1211원, 589원으로 ‘가격 대응’할 것을 결정한 사실을 명기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또 T수입사가 14일 이 지역에 주유소와 저유소를 개업하는 것에 대비, 외부용역 인원으로 ‘석유수입사 감시조’를 늘리기로 했음도 보여준다.

지역대책반은 인접지역 대책반과 연계해 ‘쥐잡기 식’ 대응을 펴기도 했다. 한때 전북지역 대책반에서 일했던 A씨는 “1월초 D수입사가 전남에서 시장진입이 막혀 전북으로 공급한 휘발유 1만4000ℓ의 일부를 한 자영 유조차량(전남xx사4xxx)이 수송하려 해 두 지역 대책반이 함께 이 차량을 추적 조사했다”고 소개했다.

석유수입사의 시장진입을 막기 위한 ‘저장탱크 봉쇄방안’은 유가자유화조치(97년 1월) 뒤에도 정유4사가 막대한 자금력으로 시장을 장악해왔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이는 인천 H사, 평택 K사, 울산 J사 등 해안에 접안시설을 갖춘 탱크업체들의 저장탱크를 장기임차나 지분매입을 통해 선점하는 것으로 ‘행동요령’까지 명시돼 있다.

정유사들은 시장통제를 위해 석유관련법을 유리하게 뜯어고치겠다는 대담한 발상을 하기도 했다. 정유사가 수입하는 원유와 석유수입사가 수입하는 석유제품간에 똑같이 적용되는 수입부과금(배럴당 1.7달러)과 관세를 수입제품에 한해 높게 적용할 것을 추진했던 것.

▽“담합은 실제 이뤄졌다”〓전북지역에서 자영 탱크로리업을 하는 L씨는 올해 초 수입사 기름을 받았다가 정유회사로부터 ‘협박성 통고’를 들었다.

“올해 초 수입사의 기름이 싸다고 해서 이를 받아 두 대의 탱크로리로 몇몇 대리점에 넘겼더니 얼마 뒤 정유회사 직원이 내 탱크로리의 차량번호가 찍힌 사진을 들이밀더군요. ‘우리와 장사하기 싫으냐’면서 말입니다.” 정유회사들의 집요한 추적과 압력에 기겁한 L씨는 그 뒤 수입사와 거래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98년 10월 울산의 한 탱크업자에게 2만5000㎘짜리 탱크를 3년간 임대한 한 석유수입업체는 지난해 일방적으로 계약파기통보를 받았다. 석유를 저장할 곳이 없어진 이 석유수입업체는 임대업자에게 ‘사정 반 협박 반’으로 올 10월까지만 탱크를 계속 빌리기로 했다. 그 뒤에는 수입물량을 저장할 길이 막막하다.

정유사들의 석유관련법 개정 시도도 구체적인 로비과정은 알 수 없으나 ‘성과’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7월말 시행예정인 석유사업법시행령 개정안에 그들이 희망했던 수입부과금 차등화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기 때문. 이와 관련해 공정거래위 관계자는 “정부 내에서도 ‘부과금 차등적용’ 방안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다”고 전했다.

▽또다른 담합 가능성〓석유업계 관계자들은 보고서에 나타난 정유사들의 담합 행태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지난해까지 모정유사에 근무했던 B씨는 “최근 부산지역에서 수입사들이 휘발유를 드럼(200ℓ)당 정상가격보다 1만1000원 싸게 공급하자 정유사들이 ‘혼내주자’며 일률적으로 1만4000∼1만5000원씩 싸게 팔아 결국 석유수입사를 쫓아냈다”고 전했다.

서울 강남구의 한 주유소 사장도 “올해 말 A정유사와 계약이 끝나 내년부터 다른 정유사와 계약을 하려고 B, C사를 찾아갔더니 다짜고짜 A사와 거래를 계속하라고 권했다”며 “알고 보니 각사가 시장점유율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정유사와 거래하던 주유소는 아예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주유소협회의 관계자들은 정유사들의 이같은 ‘막가파’식 담합행위 때문에 공급자 논리대로 가격이 결정되는 것은 물론 소비자들은 보다 싸고 다양한 석유제품을 접할 수 있는 통로를 봉쇄당한다고 입을 모은다.

<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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