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가 남긴것 23]「무너진 신뢰」 거짓말청문회

  • 입력 1997년 5월 29일 19시 56분


지난달 25일 金泳三(김영삼)대통령의 차남 賢哲(현철)씨가 국회 한보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 대부분의 혐의사실에 대해 부인으로 일관했을 때 대다수 국민은 그다지 큰 분노를 표시하지 않았다. 현철씨가 눈물까지 보이며 「사죄발언」으로 일관한데 대한 동정이었을까, 아니면 「그만하면 됐다」는 용서였을까. 국민의 반응은 동정이나 용서보다 더 심각했다. 그날 시민반응을 얻기 위해 이리저리 전화를 돌리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다닌 기자들은 한결같이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그동안 증인들이 너무 거짓말만 해와서 그런지 김현철씨의 증언이 거짓이라고 생각되면서도 특별한 느낌은 없다. 다만 자라나는 아이들이 TV로 생중계되는 청문회를 보고 거짓말하는 버릇을 배울까 두렵다』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현직 대통령 아들의 구속사태까지 몰고온 「한보사건」은 가뜩이나 어려운 국가경제를 벼랑으로 내몰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국민에게 남긴 상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을 훼손시킨 점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선진국에서는 범죄행위 자체보다 공개석상에서 거짓말을 한데 대한 심판이 훨씬 가혹하다. 범법자는 그에 따른 죄값만 치르면 되지만 거짓말쟁이는 신용을 잃어 그 사회에서 재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지난해 제레미 버다 전 미국 해군참모총장은 실전에 직접 참가했을 때만 달 수 있는 V자형 전투휘장을 「거짓으로」 달고 다닌 사실이 문제가 되자 해군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도청사실 그 자체보다는 초기에 이 사실을 부인한 점이 국민적 분노를 불러 일으켜 결국 하야의 치욕을 맛보았다. 한보사건을 시작으로 꼬리를 물듯 이어지는 혼란스런 시국을 바라보며 국민은 마치 난파선을 탄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예측이 불가능한 사회, 상호간에 신뢰하지 못하는 사회, 예기치 않았던 인재(人災)가 불쑥 터져나와 국민의 가슴을 뛰게 하는 사회는 선진국과 거리가 멀다. 김대통령은 올해초 신년휘호로 「有始有終(유시유종)」을 썼다. 「시작과 끝이 한결같다」는 뜻이다. 그러나 국민은 올해 들어서만도 벌써 여러 번 有始變終(유시변종)으로 인해 가슴에 멍이 들었다. 날치기통과된 노동법의 재개정이 그렇고 한보사건에 대해 검찰이 수사사령탑을 교체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재수사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렇다. 김현철씨 처리문제를 둘러싼 여당의 말바꾸기와 92년 대선자금에 대한 입장표명 방침의 번복을 지켜보는 국민은 소위 「지도층인사」들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한보사태 관련자 중 한 번도 말을 바꾸지 않은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국민은 지금 거짓말의 홍수때문에 분노와 무력감, 심리적 혼란상태에 빠져 있다. 연세대 사회학과 柳錫春(유석춘)교수는 한보청문회의 부정적 여파로 국민 사이에 정신적 공황이 일어날 가능성조차 없지 않다고 말했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TV에 나와 뻔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고 「무엇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가치관의 전도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유교수는 특히 『청소년의 경우 선생님이나 부모 등 기존의 권위를 얕잡아 보고 무시해 버리는 냉소주의로 발전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얼마전 미국의 한 정신의학자 블린턴은 거짓말쟁이들에게 궤양 불면증 경련성 대장염 등과 같은 스트레스성 질병의 발병률이 높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거짓말쟁이가 사회지도층일 때의 피해는 당사자에게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한보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왔던 朴錫台(박석태) 전 제일은행상무는 진실을 밝힐 수도, 안밝힐 수도 없는 현실적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거짓말 경연장이 돼버린 청문회 풍토가 한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간 셈이다. 88서울올림픽으로 다져진 국민적 단합과 의욕, 질서의식이 5공청문회 이후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많은 국민은 한보청문회를 지켜보면서 청문회무용론까지 제기했다. 진실규명은 제대로 못한 채 출석증인들의 해명장으로 이용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사회 곳곳에서 『그동안 국민이 피땀흘려 쌓아놓은 국제신용도가 최근 몇달간 걷잡을 수 없이 하락해 21세기 국가경영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걱정이 커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30일 김대통령이 밝히는 대선자금에 대한 입장표명과 다음달 5일경 발표될 검찰의 한보사건 최종수사결과가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이뤄지느냐가 우선 중요한 과제다. 이 조건이 충분하다면 한국인 특유의 「근성」으로 무너진 신뢰를 다시 세워가며 지금의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반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 대다수 국민의 믿음이다. 〈윤종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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