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상실 뒤에 찾아오는 경이로운 삶의 결기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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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베스트셀러]1987년 종합베스트셀러 2위(교보문고 기준)
◇접시꽃 당신/도종환 지음/136쪽·1만 원·실천문학사

김소연 시인
김소연 시인
뛰어난 예술가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거나 불운의 명작을 남긴다고 사람들은 구분하기 좋아해왔다. 그렇지만, 이제는 이것도 다 옛말인 것 같다.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명작은 그저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여 묻힌다. 불행히도 명작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다.

하지만 명작의 반열에 올라서 더 불행해지는 경우도 이따금 있었던 것 같다.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이 이에 속하지 않았을까. 후속작 ‘접시꽃 당신 2’의 개정판에서 시인 스스로 ‘시인의 말’에 언급해둔 “슬픔을 팔아 장사해 왔다는 비판”을 가장 따갑게 받았던 시집이기도 했다. 민중에서 대중으로 옮겨가버린 저항 시인의 대명사로 자주 언급됐다.

거의 모든 시집들을 섭렵해 읽으며 아침저녁으로 시를 써댄 열렬한 습작기를 지냈던 나도,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너무 유명해서 일부러 그랬던 것도 같고, 너무 유명한 나머지 내가 굳이 펼쳐 읽지 않아도 여기저기에서 수없이 인용되고 들려왔기 때문에 이미 읽어버린 시집처럼 여겨진 탓도 있었다.

처음 제대로 읽은 이 시집은 소문과 달랐다. 죽은 아내를 추모하며 쓴, 한 개인의 순애보적인 시편들로만 읽히지 않았다. 지키고 싶은 생명을 지킬 수 없게 되었을 때에 한 인간에게 슬픔만이 찾아오진 않듯, 이 시집도 그러했다.

표제작 ‘접시꽃 당신’을 살펴보자면,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같은 회한만이 강요될 때에 이 시는 아내를 잃은 남자의 순애보가 되겠지만,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라는 각성이, 후반부에서는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와 같은 약속으로 이어진다.

마치 아내로부터 계시를 받은 듯한 인물로 변화돼 갔던 시인은, 안쓰러운 생명들을 돌보는 자의 목소리를 내려고 애를 쓰는 한편으로 굳센 의지를 향해 눈물의 힘으로 나아가는 듯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남겨진 자는 상실감만 체득하지는 않는다는 것, 상실감이라는 것은 ‘이제부터는 다르게 살아야만 한다’는 억척스럽고도 경이로운 삶의 결기를 이미 포함하고 있다.

이 지점 때문에 아마도 당대의 대중들은 그토록 열렬히 이 시집을 환호했을지도 모르겠다. 슬픔과 좌절에 기대어 울고 있을 게 아니라 다르게 살고 싶다고 작정을 해야겠기에 말이다. “눈에 보이는 빼앗김보다/눈에 보이지 않는 빼앗김으로” 인해 “더 많은 것을 잃어”(‘병실에서’) 갔던 시대가 저물고,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빼앗김이라 여겼던 것들조차 볼 수 있게 된 시대이다. 다르게 살고 싶다는 작정이 그래서 더 또렷해진 시대가 온 것 같다.

김소연 시인
#접시꽃 당신#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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