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예술부터 과학기술까지… 가벼움에 빠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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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움의 시대/질 리포베츠키 지음·이재형 옮김/388쪽·1만8000원·문예출판사

스위스 건축회사 헤르초크&드뫼롱이 설계해 2006년 독일 월드컵 경기장으로 쓰인 뮌헨 알리안츠 아레나. 저자는 “가벼운 것의 혁명이 건축 스펙터클의 양상을 변화시킨 결과 광고판처럼 기능하는 미디어 시그널을 보여주는 건축물이 나타났다”고 썼다. 동아일보DB
스위스 건축회사 헤르초크&드뫼롱이 설계해 2006년 독일 월드컵 경기장으로 쓰인 뮌헨 알리안츠 아레나. 저자는 “가벼운 것의 혁명이 건축 스펙터클의 양상을 변화시킨 결과 광고판처럼 기능하는 미디어 시그널을 보여주는 건축물이 나타났다”고 썼다. 동아일보DB
“가벼움의 질서는 이제 생활이나 타인에 대한 개인의 태도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경제와 문화의 포괄적 기능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필요의 세계와 하찮은 세계가 늘 서로 뒤섞여 교배한다. 가벼움의 규범이 이미 모든 영역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프랑스 그르노블대 철학과 교수인 저자는 서문에서 예술, 건축, 디자인, 금융, 미디어, 스포츠, 요리, 의학, 교육, 농업, 기계공학, 디지털기술, 에너지산업 등 현대 인간 사회의 모든 영역에 ‘가벼움의 유토피아’가 도래했다고 전제했다. 이 책은 그런 가벼움의 경향을 찬양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으려 경계하면서 다양한 현상에 도래한 가치관의 변화를 고찰한다.

거의 언제나 인간사의 주변부에 유희의 양식으로 머물렀던 가벼움의 질서는 오늘날 모든 상황의 우선적 목표로 입지를 굳혔다. 가벼운 것은 더 이상 진지한 것의 반대편에 머물지 않는다. 저자는 “진지한 것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해야 할 뿐 아니라 시장경제를 따르는 세계를 가벼움의 형태로 재구성해야 하게 됐다”고 썼다.

이 책이 ‘가벼움의 혁명’을 추동한 힘으로 지목한 것은 극단적 개인주의, 그리고 끝없는 오락적 소비를 지향하는 하이퍼(hyper·超) 자본주의다. 하이퍼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현상과 기술이 변화하는 양상의 가속화가 사람들의 소비 활동을 이끌어 나간다. 신형 스마트폰 모델은 8개월 주기로 교체 출시되고, 대중음악 히트곡은 한두 주 만에 기억 뒤로 넘어간다.

그런 시대에서는 무엇이 새로운 정보인지 경계가 흐려진다. 비극적 속보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드라마틱한 사건과 스캔들이 쉴 틈 없이 폭로된다. 서로 아무 관계를 맺지 않으며 불연속적으로 처리되는 정보들 사이에서 소비자는 끔찍한 비극을 접한 뒤 바로 몇 초 만에 유쾌한 오락으로 넘어간다. 비극마저 빠른 리듬으로 가벼움에 포위되고 있는 것이다.

“하이퍼 모던 시대의 개인은 세상을 바꾸겠다는 야망도, 계급 없는 사회와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겠다는 이상도 표방하지 않는다. 그저 ‘숨 쉬고 싶어 할’ 뿐이다. 그리고 그저 더 잘, 더 가볍게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저자는 가벼움을 지향하는 문명이 인간에게 가벼운 삶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음을 지적한다. 기술적 환경의 가볍고 빠른 변화가 생활의 부담을 덜어주기는커녕 점점 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삶을 짓누르게 됐다는 얘기다. 언제나 즉각적으로 응답해야 하는 긴급함의 노동 계율, 고용 불안과 불확실성, 전통적 가족관계의 희석 등이 삶에 무거움을 드리운다.

그럼에도 현대 사회의 무의미한 경박함을 악마처럼 대하는 것도, 또는 반대로 그것을 미화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는 것이 책의 관점이다. 저자는 가벼움의 대규모 산업화가 민주적 자유를 공고히 하고 안정된 개인화 세계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고 인정한다. 다만 지나친 가벼움이 가벼움의 본질적 가치를 갉아먹는 현상을 경계해야 한다고 밝혔다.

“가벼움에 높은 가치가 부여됐다고 해서 고단하고 진지한 학습, 조직화되고 제어된 작업, 무겁게 여겨지는 속박의 가치가 절하돼서는 안 된다. 아름답고 가벼운 삶이 소비지상주의적 쾌락의 한계 속에 갇힌다면 인간의 존엄성이 모욕당하고 정신적 자유의 조건이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가벼움의 시대#질 리포베츠키#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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