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잔향]자체검열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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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누구든, 길고 복잡하고 딱딱한 문장은 읽지 않으니까요. 짧고 쉽게, 가벼운 문투로 써주세요.”

최근 만나 차 한 주전자를 나눠 마신 인문학 베스트셀러 저자가 전한 ‘출판사의 집필지침’이다. 그의 책은 주어진 지침을 충실히 따랐다.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산책하듯 세계 곳곳의 풍물과 정보를 시종 발랄한 문장으로 소개한다.

대학에서 그의 강의를 들어볼 기회가 없어 알 길 없으나, 만약 강의를 진행하는 분위기도 책과 비슷하다면 학기 초에 망설임 없이 수강신청을 취소했을 거다. 취향이다. 무지개 빛깔 그릇에 담아낸 음식은 아무리 재료가 훌륭해도 먹을 마음 안 난다.

출판사의 지침이나 그 저자의 문장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건 결코 아니다. 내게 언감생심 그런 판가름할 자격도 없다. 출판사는 최대한 많은 독자에게 책을 닿게 할 방법을 여러모로 고민한 끝에 저자에게 그런 제안을 했을 거다. 저자는 요령껏 그 가이드라인을 따라 풍성한 글을 엮어내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넉넉히 그러리라 짐작했던 사실임에도 구체적인 말로 전해 들으니 기쁘지 않았다. 어리석은 오지랖이지만 심지어 슬펐다.

한 가지 주제에 대해 만 명의 사람이 제각각 만 권의 책을 쓰는 데는 만 가지 까닭과 만 가지 방법이 있을 거라 나는 한때 믿었다. 어떤 책을 쓰든 지침으로 삼아야 하는 길이 한 가지로 정해져 있다면 굳이 글과 책을 써야 할 까닭이 있을지, 그런 고민을 한 적이 있다.

무난하고 엇비슷하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뭐든 적당히 알아서 걸러 내놓는다. ‘둥글게 살아야 한다’는 게, 이런 의미였을지.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인문학 베스트셀러#출판사의 집필지침#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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