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한 젓가락에 담긴 위로… 예술… 소통… 친구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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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人4色 ‘내 인생 최고의 라면’]

《인생라면. 언젠가부터 유행하는 말이다. ‘내 인생 최고의 라면’이라는 뜻이다. 인생라면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도 제일 좋아하는 라면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다. 지난해 11월 농림축산식품부가 밝힌 한국인의 1인당 라면 소비량은 연간 76개다. 5일에 한 번꼴로 라면을 먹는다는 얘기. 세계에서 단연 1위로, 2위인 베트남(55개)의 소비량을 크게 앞선다. 이런 음식이 라면 말고 또 있을까.(밥만 먹는 경우는 없으니 밥은 경쟁에서 제외다.) 이렇게 라면을 사랑하는 한국인인데 인생라면 하나쯤 없다면 오히려 이상할 터. 2명의 남자와 2명의 여자로부터 인생라면에 대해 들어봤다. 듣고 나니 왜 인생라면이라는 말이 생겼는지 알 것 같았다. 꼬불꼬불한 면발처럼, 뜨거운데 시원한 국물처럼, 라면에는 인생이 담겼다.》

신라면 애호 이연재 씨

세무사 시험 떨어져 좌절했을때… 분식집 아줌마가 보낸 응원의 맛


2014년 11월 중순 어느 날 오후. 당시 34세였던 이연재 씨는 서울 종로구 연지동 분식집의 문을 열었다. 보름간 술만 퍼마시다가 찾은 이곳. 다름 아닌 4년 동안 1주일에 5번씩 찾았던 단골집이었다.

그는 신라면을 주문했다. 분식집 여사장님은 여느 때처럼 계란을 먹기 좋게 풀어낸 라면을 내왔다. 이 씨는 한숨 끝에 입을 열었다. 세무사 2차 시험에서 또 떨어졌다는 말. 이제 공부 그만하겠다는 말. 그의 말을 들은 사장님은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너라면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당장 학원으로 뛰어가 공부할 거라고. 포기하지 말라고. 이 씨는 그길로 다시 학원으로 갔다. 그는 2015년 세무사 1차, 2차 시험을 통과해 세무사가 됐다.

이 씨에게 분식집 사장님은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30년이라는 나이 차를 뛰어넘은 친구이기도 했다. 서른이 넘어 뒤늦게 세무사 공부를 시작한 그는 저녁이면 분식집을 찾곤 했다. 학원과 고시원, 그리고 분식집이 그가 머무는 공간의 전부인 시절이었다. 테이블이 5개뿐인 작은 식당이지만 그의 삶에는 오아시스였다.

그는 늘 신라면을 먹었다. 혀끝에 감기는 매운맛이 불안함을 잠시나마 잊게 했다. 이 씨는 라면을 먹으며 사장님과 세상 얘기를 나눴다. 하루 종일 그가 타인과 나누는 대화는 사장님과의 몇 마디뿐이었다. 종종 소주 한 병을 사 들고 분식집에 가기도 했다. 사장님은 저놈 또 술 사들고 왔다며 인상을 썼다. 그러면서 계란을 곱빼기로 넣은 라면에 김치를 넉넉히 썰어 내놓곤 했다.

이 씨는 지금도 종종 그 분식집을 찾는다. 신라면을 먹으며 사장님에게 세금 상담을 해준다. 그는 집에서도 자주 신라면을 끓여 먹는다. 맛있긴 해도 분식집에서 먹던 그 맛은 아니다. 뭘 먹어도 모래를 씹는 것 같았던 시절에 유일하게 맛있었던 그것.

그에게 라면은 ‘위로’다.

팔도비빔면 사랑 이그림 씨

고명-소스 바꾸며 매번 새 조리법… 창작의 욕구도 함께 타올라요
 


“다른 재료를 하나도 안 넣고 라면을 먹는다고요? 그건 라면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해요. 라면이 얼마나 훌륭한 요리가 될 수 있는데요.”

봉지에 든 면과 수프만 가지고 라면을 끓이면 모욕이라니. 어떻게 라면을 먹으라는 걸까. 신념이 확고한 이그림 씨(59·여)는 라면 봉지를 옆에 두고 고명부터 다듬기 시작했다. 작년 가을 오크라에 비트 물을 들여 담근 자줏빛 장아찌를 썰었다. 직접 키운 보리 새싹도 잘랐다. 셀러리와 전호 나물도 다듬었다. 그러는 사이 끓기 시작한 물에 팔도비빔면의 면을 넣었다. 면발을 찬물로 씻은 후 비빔면 소스와 직접 담근 고추장을 반반 섞어서 비볐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놓은 화려한 고명들을 올렸다.

“지금까지 똑같은 라면을 만들어본 적이 없어요. 매번 새로운 조리법을 시도해요. 고명을 달리하기도 하고 소스를 바꾸기도 하고 면을 익힐 때 이것저것 넣어보기도 하죠.”

그런 그에게 비빔면은 최고의 도구다. 어떤 재료든지 훌륭하게 소화해내기 때문이다. 처음 독창적인 비빔면 요리를 한 건 두 아들 때문이었다. 채소를 싫어하는 아들들을 위해 비빔면에 여러 채소를 섞었다. 아들들은 곧잘 먹었다. 수박즙과 고추장을 섞어 만든 소스로 맛을 낸 비빔면을 수박 위에 얹은 수박라면을 만들었을 때에는 주변의 감탄이 쏟아졌다. 이 씨는 누구나 쉽게 시도할 수 있는 새로운 비빔면 재료로 딸기와 죽순을 추천했다. 비빔면 소스에 딸기 2개를 갈아 넣으면 상큼한 맛이 더해진다. 여기에 말린 죽순을 데쳐서 물기를 짜면 쫄깃해지는데 새콤달콤한 면발과 함께 먹기에 제격이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전공을 물어보니 동양화란다.

“그림과 라면은 많이 닮았어요. 끊임없이 새로운 창작 욕구를 불러일으키거든요.” 그에게 라면은 ‘예술’이다.

진짬뽕 마니아 이동현 씨

부모님-여자친구-동호회원들과 함께하는 즐거움에 맛도 두 배

 

이동현 씨(29)는 일요일이면 늦잠을 잔다. 정오가 다 돼서야 일어난다. 지난밤의 술자리가 떠오르면서 취기가 살아난다. 취기를 달래기 위해 그가 찾는 것은 오뚜기 진짬뽕이다. 이 씨는 요즘 매주 일요일 오후 2, 3시면 진짬뽕을 끓여 먹는다. 그는 “진짬뽕 한 그릇에 밥까지 말아 먹으면 나른함과 취기가 모두 달아나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작년 10월 진짬뽕이 나오기 전까지 이 씨는 특별히 좋아하는 라면이 없었다. 대부분의 라면은 먹고 나면 텁텁한 느낌이 남았다. 그래서 어떤 라면이든 쉽게 질리곤 했다. 하지만 진짬뽕은 달랐다. 굵고 쫄깃한 면발을 따라 올라오는 국물이 깔끔했다. 혀부터 목까지 넘어가는 느낌이 시원했다.

면보다는 밥을 좋아하는 아버지에게도 진짬뽕은 예외다. 아버지는 이 씨가 일요일에 진짬뽕을 끓일 때면 식탁에 앉는다. 어머니도 슬쩍 합류한다. 이 씨는 “부모님도 좋아하셔서 더 많이 먹게 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진짬뽕에 매료된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먹어볼 것을 권한다. 지난해 연말 스쿼시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한 엠티에서 그는 직접 요리사로 나섰다. 진짬뽕에 각종 해물과 야채를 넣고 끓였다. 사람들은 “정말 짬뽕 같다”며 좋아했다.

진짬뽕을 자주 끓이다 보니 점점 조리 실력이 늘고 있다. 그는 “바지락 새우 오징어 등 해물을 넣고 파와 양파도 양껏 넣으면 멋으로나 맛으로나 중국음식점의 짬뽕처럼 만들어진다”고 전했다. 라면을 안 좋아하는 여자친구도 이 씨가 끓이는 진짬뽕만큼은 사양 않고 먹고 간다. 그는 “진짬뽕은 내가 요리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주변 사람들과 함께 즐길 수 있어서 더욱 좋다. 미래의 자녀에게도 ‘아빠표 짬뽕’이라고 뽐내며 만들어 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라면은 ‘소통’이다.


불닭볶음면 환호 김세연 씨

시험기간 친구들과 한그릇 뚝딱 ‘N포세대’ 청춘 스트레스 훌훌

 

23세. 대학 4학년. 취업 준비 중. 아, 그리고 문과.

괜스레 마음이 짠해진다. 김세연 씨(23·여)는 현재 청춘의 고개를 넘고 있다. 그는 지난해 1학기를 마친 후 휴학 중이다. 현재는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그 역시 많은 청춘들처럼 일찍부터 힘들었다. 대학 입학 후 시작된 스펙 쌓기 경쟁. 긴장이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잠시나마 기분 전환을 하는 건 역시 먹을 때다. 김 씨는 많은 먹거리 중에서도 불닭볶음면을 첫손에 꼽는다.

“불닭볶음면을 먹으면 열이 확 올라왔다가 식어요. 그때 긴장이 풀리면서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느낌이에요.”

그 느낌 때문에 김 씨는 시험 기간이면 자주 불닭볶음면을 먹었다. 조별 과제를 할 때마다 친구들과 즐겨 찾는 것 역시 그것이다. 학교 매점에서 주로 먹기 때문에 컵라면을 애용했다. 불닭볶음면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모차렐라 치즈를 얹어 먹는 조리법이 많이 알려졌다. 불닭 소스의 매운맛과 치즈의 고소한 맛이 조화를 이룬다. 최근 아예 치즈 가루가 포함된 ‘치즈불닭볶음면’이 나와 김 씨 같은 불닭볶음면 마니아들은 환호했다.

김 씨는 불닭볶음면이 가장 맛있었던 순간으로 친구들과 떠난 엠티를 떠올린다. 구워 먹고 남은 고기와 김치, 밥 거기에 불닭볶음면 소스를 넣고 볶으니 흡사 제육볶음 같았다. 그 위에 얹어진 치즈도 대학생들 입맛에는 딱이었다. 청춘의 고개를 같이 넘는 친구와 함께였기에 더욱 맛있었다. 그는 2012년에 대학생이 됐고 불닭볶음면은 그해 4월에 처음 나왔다. 불닭볶음면은 그와 대학 생활을 줄곧 함께한 것이다.

“졸업 후 직장에 다니면 더 많은 스트레스가 있겠죠. 그때마다 대학 때 먹은 불닭볶음면이 생각날 것 같아요. 배도 채워주고 스트레스도 풀게 해준 좋은 친구로 기억하겠죠.”

그가 말했다. 그에게 라면은 ‘친구’다.

 
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신라면#치즈불닭볶으면#진짬뽕#팔도비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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