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의 아이러브 스테이지] 아날로그적 감성 필요할땐 ‘벽뚫남’을 찾으세요

  • 스포츠동아
  • 입력 2016년 1월 7일 05시 45분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는 장면 하나 하나가 수채화를 연상시킬 만큼 곱고 섬세하다. 화려한 볼거리 대신 순수한 음악과 따뜻한 이야기만으로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 시대 마지막 아날로그 대극장 뮤지컬로 불린다. 사진제공|쇼노트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는 장면 하나 하나가 수채화를 연상시킬 만큼 곱고 섬세하다. 화려한 볼거리 대신 순수한 음악과 따뜻한 이야기만으로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 시대 마지막 아날로그 대극장 뮤지컬로 불린다. 사진제공|쇼노트
■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

듀티율 역에 이지훈·유연석 더블캐스팅
끊임없는 변신 고창석·조재윤 연기 일품
아날로그적 무대 아날로그적 감동 선사


연말이면 찾아와 새해에 작별인사를 고하는 뮤지컬. 눈이 휘둥그레지는 무대장치, 휘황찬란한 조명, 가슴을 울리는 합창은 없지만 보는 내내 미소가 그치지 않는 뮤지컬. 그래서 이 시대의 마지막 아날로그 대극장 뮤지컬로 불리는 작품.

프랑스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이하 벽뚫남)’다. 무대만 아날로그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방식도 아날로그적이다. 감동마저 강요당하는 시대에 벽뚫남은 그저 말없이 따뜻한 손을 내밀 뿐이다. 보고 있으면 묘하게도 차갑게 식어 있던 몸과 마음에 피가 돌기 시작한다. 얼굴색이 살아나고, 근육이 풀어진다. 미소가 지어진다. 돌처럼 단단한 마음에 구멍이 뚫려버린 것이다.

2차 대전이 끝난 프랑스의 파리. 우체국 민원 처리과에서 일하는 듀티율은 주변 어디에서나 한 명쯤 있을 법한 흔하고 흔한 보통남자다. 오죽하면 극중에서 듀티율이 부르는 넘버 중에 “난 그저 보통남자”란 곡도 있다(굉장히 좋은 노래이니 꼭 들어보세요).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듀티율은 어느 날 갑자기 벽을 스윽 통과하는 능력을 얻게 된다. 빵집 벽을 뚫고 들어가 빵을 훔쳐 노숙자에게 쥐어주고, 신세한탄을 하는 늙은 창녀의 목에 보석 목걸이를 걸어준다. 뚜네뚜네란 이름의 사회적 영웅이 되어버린 듀티율. 매일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며 더 이상 보통남자가 아닌 특별한 남자가 되었지만, 그에게도 가질 수 없는 게 있었으니 바로 같은 거리에 살고 있는 불행한 부인 이사벨이다.

이 모든 이야기가 마치 한 장의 수채화처럼 그려진다.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이다. 구질구질한 군상들의 이야기가 친근하기만 하다. 전쟁 때 ‘잘 나갔던’ 아주머니 야채 리어카에서는 양파와 가지를 사고 싶고, 신문팔이 소년에게서 조간신문을 사고 싶다. 알코올중독자 의사 듀블을 찾아가 연애상담을 해보고 싶고, “우리 폼 나지? 이거 진짜 총이다!”하는 경찰 아저씨들과는 라면을 먹으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싶다.

벽을 뚫는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그토록 사랑하는 여자 방에 들어가 볼 생각조차 해보지 않는 ‘보통 남자’ 듀티율은 이지훈과 유연석이 번갈아 맡고 있다. 인기 방송 프로그램 복면가왕에 ‘김장군’ 가면을 쓰고 나와 천하의 캣츠걸과 맞짱을 뜨며 가창력을 과시한 이지훈은 잘 생긴 부잣집 오빠 얼굴 뒤에 감춰져 있던 ‘바보 끼’를 처음으로 선보인다. 보고 있으면 “참 못났군”이란 감탄(?)이 절로 나오게 된다.

새장 속의 여인 같은 이사벨은 배다해와 문진아. 청초한 외모와 음색을 지닌 배다해는 이사벨에 적역이다. 1막 후반의 솔로곡, 2막 듀티율과의 듀엣이 절절하다. 너무도 사랑스러워 망치로 벽을 뚫고서라도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우러난다. 알코올중독자 의사, 변호사, 형무소장, 경찰로 끊임없이 변신하는 고창석과 조재윤의 연기도 뛰어나다. 고창석의 듀블은 원래부터 정평이 나 있었다. 빨간 코에 술병을 들고 무대에 나와 “나 한때는 잘 나갔다”하는 듀블 연기에 관객은 몇 번이나 자지러지게 된다. 지난 시즌에 듀블을 맡았던 임철형은 이번에 우체국 부장과 검사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임철형은 배우이자 벽뚫남의 명연출이기도 하다. 듀티율과 같은 우체국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감초연기도 극의 맛을 살린다. ‘공무원A’ 이세령의 당돌한 코믹연기를 볼 수 있다. ‘공무원 M양’의 정인지는 이 작품의 숨은 매력 포인트. 등장할 때마다 무대의 조도가 올라가는 듯한 존재감을 발휘했다.

2월14일까지 서울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한다. 1997년 프랑스 몰리에르상 최우수 뮤지컬상, 최우수 연출상을 받은 작품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공연이 끝난 뒤 꽃다발 대신 조그마한 나만의 상을 무대 앞에 놓아두고 나오고 싶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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