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좌절-저항의 세대, 자유의 코드 그런지룩에 열광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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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아의 스타일포스트

‘그런지’의 미학을 살린 2013년 가을·겨울 컬렉션. 왼쪽부터 ‘생로랑’, ‘BCBG 막스 아즈리아’, ‘DKNY’가 그런지룩의 핵심인 ‘자유로운 영혼’을 담아 선보인 대표 의상들. 인터패션플래닝 제공
‘그런지’의 미학을 살린 2013년 가을·겨울 컬렉션. 왼쪽부터 ‘생로랑’, ‘BCBG 막스 아즈리아’, ‘DKNY’가 그런지룩의 핵심인 ‘자유로운 영혼’을 담아 선보인 대표 의상들. 인터패션플래닝 제공
‘그런지(grunge).’

오물, 쓰레기, 타락 등 부정적인 의미가 더 많은 단어지만 ‘그런지룩’은 엄연한 패션 용어다. 이 패션 트렌드는 1980년대 미국 시애틀을 중심으로 탄생한 밴드 ‘펄잼’과 ‘너바나’가 주도한 얼터너티브 록의 유행과 함께 시작됐다.

그런지룩은 1980년대의 정통 하이패션과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나타난 패션 코드다. 한마디로 ‘의도적으로 더럽고 지저분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아무렇게나 연출해 입는다는 점에서 빈티지와 유사하지만 좀 더 개성적인 게 차이점이다.

여러 가지 스타일을 창의적으로 섞거나, 거기서 더 나아가 정반대 느낌의 소재를 매치한다. 너바나의 리드싱어 커트 코베인의 헤어스타일과 늘어진 티셔츠, 너덜너덜 찢어진 청바지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듯하다.

자유로운 분위기와 하류층의 남루한 복식에서 영향을 받은 그런지룩은 1960년대의 ‘히피룩’과도 유사하다. 또 ‘자유로운 영혼’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1970년대 펑크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콘셉트를 자세히 뜯어보면 시대적 간극만큼이나 큰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펑크는 타이트한 가죽 팬츠와 바이커 재킷, 안전핀과 스터드 장식으로 대표되는 아이템을 차용하고, 머리 스타일 역시 닭 볏 모양의 모히칸 스타일로 어느 정도 한정된 콘셉트를 선보인다. 반면 그런지는 좀 더 형식에서 탈피한 패션이다. 막 자고 일어난 듯 흐트러진 헤어스타일과 개성이 넘치는 믹스매치…. 한마디로 펑크가 그 나름으로 ‘한껏 꾸민 패션’이라면 그런지는 ‘꾸밈없는 패션’이다.

이런 그런지룩을 최근에는 스트리트 패션에서뿐 아니라 주요 패션 도시에서 열리는 컬렉션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디자이너들은 그런지를 직접 차용하기도 하고, 우회적으로 재해석해 표현하기도 한다.

그중 마크 제이컵스는 그저 허술한 느낌뿐이던 그런지룩을 하이패션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대표적인 디자이너라 할 수 있다. 1988년 페리 엘리스에 영입된 제이컵스는 1992년에 발표한 1993년 봄·여름 컬렉션에 ‘그런지 컬렉션’을 선보였다.

이 컬렉션에서는 최고급 실크 원단으로 낡은 플란넬 체크 셔츠의 느낌을 살린 디자인과 새틴 소재의 버켄스톡 신발, 닥터 마틴 군화, 싸구려 방한 내의처럼 보이는 캐시미어 스웨터 등이 발표됐다. 하지만 이 컬렉션은 페리 엘리스의 고상한 상류층 고객과 경영진, 패션 언론 모두를 경악하게 했으며, 컬렉션이 끝난 후 제이컵스는 바로 해고당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제이컵스는 1992년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CFDA)가 주는 ‘올해의 여성복 디자이너 상’을 차지하는 영예를 안게 됐다. 또 ‘그런지의 창시자(the Guru of Grunge)’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1990년대 안티 패션 운동을 이끄는 독창적이고 대담한 디자이너로 주목받게 된 것이다.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의 좌절감과 저항의 거리 패션을 디자인 요소로 차용해 최고급 소재의 하이패션으로 승화한 그의 용기에 패션계가 결국 박수를 보내게 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개인의 독창성이 무엇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획일화된 트렌드 안에서 살고 있는 요즘의 우리들에게 그런지룩의 부활은 또 다른 시사점을 준다. ‘자유로움의 표상’인 그런지룩을 통해 작은 일탈을 꿈꾸는 것 말이다. 이를 통해 현대인들은 소심하고도 아름답게 저항정신을 표출하고 있다.

황선아 인터패션플래닝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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