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식당 착한 이야기]충북 옥천 ‘구읍할매묵집’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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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 30년 쒀보니 알겠네, 남긴 손님에 호통친 어머니 마음

충북 옥천 ‘구읍할매묵집’을 물려받은 강일호(오른쪽) 최순자 씨 부부는 100% 국내산 도토리를 가마솥에 넣고 나무 장작불을 때가며 옛날 방식 그대로 묵을 쑤어 낸다. 허리가 아프고 손바닥이 벗겨지는 힘든 일이지만 부부는 68년 전통의 묵 맛을 지켜내겠다고 했다. 옥천=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충북 옥천 ‘구읍할매묵집’을 물려받은 강일호(오른쪽) 최순자 씨 부부는 100% 국내산 도토리를 가마솥에 넣고 나무 장작불을 때가며 옛날 방식 그대로 묵을 쑤어 낸다. 허리가 아프고 손바닥이 벗겨지는 힘든 일이지만 부부는 68년 전통의 묵 맛을 지켜내겠다고 했다. 옥천=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충북 옥천군 옥천읍 문정리 ‘구읍할매묵집’으로 가는 길은 한가로웠다. 경부고속도로 옥천나들목에서 나와 보은 쪽으로 가는 왕복 2차로 도로 이름은 ‘향수길 100리’. 정지용 시인의 생가로 가는 길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묵집은 정 시인 생가에서 50m쯤 떨어져 있다.

묵집 주변 가게 이름도 정 시인의 시 제목이나 문구에서 따온 게 많다. ‘사리문 열고 들어서니’ ‘머흘머흘 골을 옮기는 구름’ ‘꽃봉오리 흔들려 씻기우고’…. 조금 더 가면 고 육영수 여사의 생가도 나온다.

68년 역사의 ‘구읍할매묵집’의 ‘구읍’은 이곳이 옛 읍 소재지였기 때문에 들어간 이름이다. 경부선 옥천역 주변으로 읍 소재지가 옮겨가기 전 식당 주변엔 5일장이 섰다. 김양순 할머니(2010년 84세 나이로 작고)가 묵집을 시작한 1946년에는 그랬다.

‘욕쟁이’ 할매가 쑨 맛난 묵

식당 안은 단출했다. 풀썩 주저앉는 테이블이 10개 남짓이다. 한쪽은 탁 트인 주방이다. 트였다기보다는 좁아서 어쩔 수 없이 칸막이를 만들지 못했을 듯하다. 식당 벽에 걸려 있는 허름한 액자 안에선 김 할머니의 옛 모습이 담긴 사진 몇 장과 이 집을 맛집으로 소개한 신문 기사가 색이 바래가고 있었다.

구읍할매묵집을 취재하기에 앞서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68년간 국산 묵만을 고집했던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중국산이 90% 이상인 국내 묵 업계에서 국산 재료만으로 묵을 만드는 게 가능한 일일까.

“어머니 고집은 누구도 꺾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70년 동안 국내산 묵만 팔 수 있었던 거죠.”

구읍할매묵집은 김 할머니의 셋째아들 강일호 씨(54)와 부인 최순자 씨(53) 단둘이 운영한다. 강 씨는 군복무를 마치고 처음 묵에 손을 대봤다. 삼형제 중 막내여서 어머니는 묵을 쑤는 곳에는 아예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러다 결혼 후 지금까지 한자리에서 묵을 쑤고 있으니 묵 경력이 얼추 30년이다.

“어머니 별명은 ‘욕쟁이’였어요. 도토리묵 한쪽이라도 남기면 손님에게 욕을 퍼부었지요. ‘지랄 염병, 묵을 왜 남겨. 도토리 한 톨 줍는 데 얼마나 힘든 줄 알아! 남김없이 처먹고 가’라고 소리치곤 했어요.”

어린 강 씨는 그런 어머니가 창피했다. 초등학교 친구들로부터 ‘욕쟁이 아들’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묵을 30년 쑤어 보니까 어머니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아요. 당신께서 애써 도토리를 직접 줍고 묵을 쑤었기에 그걸 남기는 사람을 보는 게 안타까웠던 거죠.”

며느리 최 씨도 고집 세기는 남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시어머니 앞에서는 어림없었다. “참기름을 직접 짜지 않고 집으로 팔러온 사람에게 샀다가 어머니께 얼마나 혼쭐이 났는지. 식당 뒤꼍에서 엉엉 울어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에요.”

강 씨의 아버지는 허리를 크게 다쳐 30대부터 누워서 지냈다. 농사일은 물론이고 가정일도 할 수 없었다. 김 할머니는 식구를 굶기지 않으려고 가을만 되면 도토리를 주우러 이 산 저 산을 누볐다. 묵을 쑤어 이웃집에 나눠 주기도 했다. 맛이 남 달랐다. 주변에서 ‘묵을 만들어 팔면 어떻겠느냐’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구읍할매묵집’을 차렸다. 김 할머니가 쑨 묵이 맛있고 많이 팔린다는 소문이 나자 여기저기서 도토리를 주워 팔아달라고 몰려들었다. 굳이 도토리 주우러 산에 가지 않아도 됐다. 묵만 열심히 쑤면 될 일이었다.

그동안 큰아들(인종·60), 둘째아들(의호·57), 막내아들(일호)이 줄줄이 태어났다. 그리고 맛난 묵집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혁명 이후 처갓집에 왔다가 이곳에 들렀다고 한다.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도 들른 적이 있다고 하는데 이를 확인해줄 사진은 걸려 있지 않았다.

한여름에도 가마솥에서 끓여내는 묵

이달 9일 오후 5시쯤 식당을 찾았다. 강 씨는 식당 뒤편 가마솥에서 묵을 끓여 담아내고 있었다. 앙금을 수없이 치대고 가라앉혀 떫은맛이 나는 타닌 성분을 수차례 걸러낸 뒤였다. 강 씨 근처로 다가가자 숨이 턱 막혔다. 실외온도가 28∼30도에 이르니 가마솥 주변은 어떻겠는가. 강 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끓인 묵을 천천히 묵 판에 담아냈다. 시원한 에어컨을 틀어놓고 가스불로 쑤어도 될 일. 왜 이리 고생하는 걸까.

“가마솥에 끓여야 제맛이 나요. 가스불로는 둥근 솥바닥 전체에 열을 가하기가 어려워요. 불 조절요? 나무 장작 양을 조절하면 되지요.”

가마솥에서 벗어나 식당으로 나오자 강 씨가 한 손으로 허리춤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땀을 씻으며 따라 나왔다. 30년째 구부리고 앉아 묵을 쑤다가 디스크 수술까지 했다고 한다.

부인 최 씨도 결혼한 지 10년이 넘었을 때 더 참지 못하고 한마디했다. “어머니께 이런 말씀을 드렸어요. ‘남들도 그러는데 우리도 조금 쉽게 가죠. 가스불로 묵을 쑤면 어때요’라고요. 그러고는 어찌나 혼이 났는지, 다신 그 얘기 안 꺼냈어요.”

시원한 묵국수 한 사발을 주문했다. 동치미 국물로 만 묵사발이 나왔다. 눈에 보이는 것은 얇게 썬 묵과 1년 묵은 배추김치, 그리고 생김(소금이나 참기름으로 양념하지 않은)과 참깨, 참기름이 전부였다. 국물부터 ‘후루룩’ 마셔봤다. 멸치와 다시마를 우려낸 육수였다.

사실 묵 맛을 비교하기란 쉽지 않다. 말 그대로 ‘도토리 키 재기’다. 조금 부드러운 느낌이 다르다고나 할까. 그래서 물었다. “묵 재료는, 김치는, 참깨는, 김은, 참기름은, 멸치는, 다시마는 어디에서 어떻게 구입하셨어요?” 재료를 구입하는 곳은 대부분 일정했다. 채소는 직접 재배하는 것만 사용한다고 했다.

가장 궁금한 건 도토리였다. 취재 전 전문가들에게 물었더니 대답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국내산만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 대부분 중국산이라고 생각하면 된다.”(W식품 대표). “꼭 국내산을 쓴다고 맛있는 것은 아니다.”(중부권 K묵 마을 영농조합장)

100% 국내산이란 말이 미덥지 않아 강 씨에게 묵 재료 공개를 요구했다. 강 씨는 냉동 창고 문을 열어 보였다. 꽁꽁 언 상수리열매가 눈에 띄었다. 중국산 도토리와 국내산 도토리를 구분하는 것은 비교적 쉽다. 중국산은 운송료 때문에 무게를 줄이기 위해 겉껍질을 모두 깐 뒤 수입한다.

강 씨 부부가 지금까지 국내산 재료를 사용할 수 있었던 건 대부분의 묵 제조업체나 식당이 중국산을 사용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국내산이 모두 이곳으로 몰릴 테니까. 방송이 나간 후 꽤 유명해지니 도토리를 팔려는 사람들이 값을 올려 부르기도 했다.

“국내산이 비싸다고 애써 주워온 도토리를 안 살 수 없잖아요. 집세가 안 나가고, 직접 묵을 쑤고, 종업원 없이 마누라와 함께 일하니 그나마 버틸 수 있어요.”

삼형제 중 큰형 인종 씨가 경기 포천시에서 ‘옥천구읍할매묵집’을, 둘째형 의호 씨도 대구에서 ‘시골묵집’을 하면서 서로 국산 물량을 주고받는 점도 도움이 된다. 손님이 많은 토요일에는 대덕연구단지에서 영양사로 일하는 큰딸 지혜 씨(28)와 제과제빵사인 둘째딸 지현 씨(25)도 와서 돕는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꾸준히 정직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어요. 큰딸이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물려줄 생각입니다. 할머니 생각을 딸들이 이해하고 있어서 다행이죠.”

더위가 가라앉자 강 씨는 밭에 나가 봐야 한다며 일어섰다. 겨울에 판매할 메밀묵을 쑤는 데 쓸 메밀을 재배하기 위해 울해 처음으로 인근 옥천군 이원면에 9900m²(약 3000평)의 메밀밭을 임대했다.

옥천=이기진 기자 doyoc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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