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내 장풍을 받아라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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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손가락… 스트리트 파이터 2

오락실이 흥하던 시기였다. 1만 원짜리 한 장이면 갖고 싶은 건 다 살 수 있다고 믿던 시기였다. 초등학교가 국민학교라 불리던 시기였다. 국민학생은 어느 날, 친구 따라 ‘강남’에 가게 됐다. 소읍에 있던 오락실의 이름이 다름 아닌 강남오락실이었다. 책에만 파묻혀 살았던 국민학생에게 그곳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들뜬 얼굴들이 오락실을 한가득 메우고 있었다. 겨울인데도, 후끈후끈했다. 소음과 열기로 정신이 없었다.

인기가 있는 게임에 자리가 나면 우리는 서로 앉겠다고 신경전을 벌였지만, 우리의 꿈은 사이좋게 똑같았다. 나중에 커서 오락실 사장이 되는 것. 거의 모든 게임이 서로 다른 이유로 인기 있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스트리트 파이터 2’가 펼쳐지는 모니터 앞의 줄이 제일 길었다. 나도 100원짜리 동전 몇 닢을 손에 꼭 쥐고 그 앞에 서 있었다.

스트리트 파이터 2는 당대를 주름잡은 격투기 게임이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싸움꾼들이 대결을 펼쳤다. 플레이어는 화면상에 보이는 열두 명의 캐릭터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미국에서 온 켄, 중국에서 온 춘리, 인도에서 온 달심, 그리고 브라질에서 온 블랑카도 있었다. 온천, 항구, 예배당, 카지노 등 해당 국가를 짐작할 수 있는 배경에서 결투는 진행됐다. 우리는 ‘먼나라 이웃나라’를 읽는 대신, 말 그대로 치고받고 싸우며 각국의 문화를 접했다.

거기에 한국인 캐릭터는 없었다.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일본과 중국을 부러워하며, 국민학생은 난생 처음 국력에 대해 어렴풋이 깨닫기도 했던 듯하다. 그것이 일본에서 제작된 게임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한 채, 일본 캐릭터가 두 명이나 있다는 사실에 남몰래 분개했을지도 모른다.

게임이 시작되면, 너 나 할 것 없이 재빠르게 스틱을 돌리고 사정없이 버튼을 눌렀다. 스트리트 파이터 2에 사용되는 버튼은 자그마치 여섯 개나 됐다. 최초로 커맨드(명령) 입력이 가능한 게임이기도 했다. 왼손으로 스틱을 돌리며 오른손으로 버튼을 눌러야 장풍이 나가고 뛰어오르며 어퍼컷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싸움할 때도 그렇게 많은 신체부위를 사용할까? 그렇게 많은 기술을 쓸 수 있을까? 싸움터에서는 그렇게 많은 열기가 발산될까? 싸움을 잘 못하던 내게, 모니터는 대리만족의 현장이자 상상이 펼쳐지는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격투가 벌어지는 99초 동안, 나는 내내 비장했고 상대가 공격하면 팔을 한데 모으고 공격을 온몸으로 막으려 애썼다. 그때마다 등골이 오싹하고 머리칼이 쭈뼛 섰다. 무림의 고수가 되기 위해선 이런 아픔쯤은 견뎌야 해! 이길 때나 질 때나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항상 이것이었다. 강해진다는 것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자동차 박살내기, 드럼통 깨부수기 등 간간이 등장하는 보너스 스테이지는 그야말로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주었다. 친구와 싸우고 돌아오던 길에 돌멩이를 뻥뻥 차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으니까. 으레 뒤편에는 100원을 넣고 진득하게 앉아 있는 나를 마뜩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주인아저씨가 있었다.

오락실에서 나는 싸워서 이기는 사람이었지만, 집에 도착하면 어김없이 엄마가 휘두르는 빗자루를 피해 요리조리 도망치는 겁쟁이가 되었다. 엄마에게 농구하러 간다고 나갔다가 농구공을 그만 오락실에 놓고 온 것이었다. 주인아저씨가 엄마의 친구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주인아저씨에게도 완벽히 패배한 셈이었다. 100원이 절실했다.

오은 시인 wimwenders@naver.com
#오락#국민학생#게임#스트리트 파이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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