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만하임은 등불을 켜주고, 100년전 유길준은 숙제를 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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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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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을 바꾼 책- 송호근이 만난 ‘이데올로기…’ ‘서유견문’

기자가 그의 연구실에 들어선 건 19일 오후 한 대선후보의 출마선언이 막 끝난 뒤였다. 송호근 교수는 한참이나 심각한 고민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선언문의 행간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앞으로 대선판은 어떻게 흘러갈지, 그 질문들은 그의 오랜 숙제와 이어졌다. 한국의 미래는 어디로 가는지.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기자가 그의 연구실에 들어선 건 19일 오후 한 대선후보의 출마선언이 막 끝난 뒤였다. 송호근 교수는 한참이나 심각한 고민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선언문의 행간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앞으로 대선판은 어떻게 흘러갈지, 그 질문들은 그의 오랜 숙제와 이어졌다. 한국의 미래는 어디로 가는지.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 “문학을 하겠는가?” 창밖을 응시한 채로 교수가 물었다. 뒷모습이 마치 액자 속 사진 같다고 생각할 때쯤이었다. 청년은 질문의 뜻을 한번에 알아채지 못했다. 여러 생각이 스쳤다. 그러곤 쭈뼛쭈뼛 답했다.“(원래 전공으로) 돌아가겠습니다.”스물둘 사회학도는 그 길로 인문대학을 걸어 나왔다. 1978년 봄이었다.청년시절, 문학은 그가 사는 이유였다. 왜인지는 자세히 기억하지 못한다. 까까머리 중학생은 늘 헌책방에 있었다. 시집, 소설, 인문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당시 지식인들이 보던 사상계(思想界)까지 손을 댔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신구문화사가 발간한 31권짜리 한국문학전집과 족히 50권은 됐을 세계문학전집도 몇 번이나 거듭해 읽었다. 책의 장면 장면을 머리에 아로새겼다. 그런 기질이 대학에서라고 바뀔 리 없었다. 》
전공은 사회학이면서 강의 목록은 죄다 인문학으로 채웠다. 교단에 있던 시인 송욱, 평론가 김윤식과 김현을 만났다. 그들이 ‘근대가 무엇인가’, ‘한국에 근대문학이 있었나’ 같은 질문을 던지면, 그 답을 찾으려 밤을 새웠다. 대학 3학년이던 77년부터 학생운동이 격화됐지만, 그는 여전히 낭만의 공간에 머물렀다. 사복경찰이 캠퍼스를 누비던 이듬해 봄 ‘대학문학상’ 평론부문에 당선됐다. 김윤식 교수는 그런 그에게 문학을 권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는 돌아왔다. 그는 훗날 “이미 문학으로 존재하고 있었기에, 문학을 업으로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사회학의 바다에서 송호근(56·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은 운명처럼 두 권의 책을 만났다. 카를 만하임(1893∼1947)의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1929년), 유길준(1856∼1914)의 ‘서유견문’(1895년)이었다.

○ 출정 선언문

1980년 봄 그의 손에는 만하임의 책이 들려 있었다. 검은색 표지는 벌써 닳을 대로 닳은 상태였다. 12·12쿠데타와 겨울방학이 맞물려 숨을 고르던 학생운동은 개학(3월) 즈음부터 조금씩 움트고 있었다. 대학원 2년차인 그는 여전히 현실에서 조금 비켜나 있었다. 그는 캠퍼스를 가득 메운 수백 개의 천막도 낭만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5월 2일 밤, 고등학교 후배가 그를 찾아왔다. 출정 선언문을 써 달라는 부탁이었다. 문장으로라면 이미 학교에서 정평이 나 있었다. 현실의 선봉에 서진 않았지만, 그마저 외면할 순 없었다. 우선 어지럽혀진 책상을 깨끗이 치웠다. 그리고 만하임과 그의 친구 죄르지 루카치(1885∼1971)가 치열하게 살았던 1920년대를 떠올렸다. 그의 선언문은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유럽 기성세대를 전면 부정하며 새로운 문명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던 ‘1914년(1차 세계대전 발발 연도) 세대’를 환생시켰다. 그는 “우리의 문화로, 정신적인 긴장과 유산이 뭉쳐진 시대정신으로, 기성세대의 저 얼룩진 역사의 짐을 세탁할 것이다”라고 썼다. 부제로는 ‘청년지식인의 시대적 사명’이라고 붙였다. 대학원생들은 3일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출정식을 가졌다. 선언문은 누군가가 대신 낭독했다. 5·17 비상계엄령 선포와 함께 그도, 그 낭독자도 수배자 신세가 됐다. 인천에서 2주일을 숨어 있었다. 수방사에서 군복무 중이던 친구의 도움으로 다행히 감옥행만큼은 피했다.

그러나 낭만과 현실의 경계에 서 있던 그에게 암울했던 그 봄은 큰 충격이었다.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등장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무수한 모순이 목격됐다. 낭만적 환상은 깨졌고, 그제야 현실정치가 눈에 들어왔다. 다만 접근 방법이 달랐다.

“현실정치를 직접 파헤치려 하진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통째로, 세련되게 (사회 전체를) 세탁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죠.”

그는 다시 만하임에 빠져들었다. 거기에 답이 있을 것 같았다. ‘신문기자를 할까’라는 고민도 접었다. 학자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를 스무 번쯤 봤다. 1920년대의 유럽과 1980년대의 한국은 너무도 비슷했다. 이데올로기의 난투극이 펼쳐지는 동안 만하임이 고민하던 것을 그 역시 고민하고 있었다. 83년 그는 ‘칼 만하임의 지식사회학 연구’(홍성사)를 펴냈다. 석사 학위 논문을 진전시킨 그의 첫 저서였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사상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만하임은 그에게 해답을 준 게 아니었다. 그 대신 만하임의 책은 새로운 과제를 남겼다.

‘사상도 아니라면 현실을 제대로 알아야겠다.’

이듬해 그는 하버드로 유학을 떠났다. 선진정치의 중심에서 한국적 현실의 해답을 찾고 싶었다.

○ 조선 유학생

사상에서 현실로 회귀하면서 그가 천착한 주제는 노동이었다. 1970년대 태동한 한국의 노동운동은 1980년대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본격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진 학문을 배우겠다고 찾아간 미국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미국은 이미 단순한 풍요를 넘어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모색하던 때였다. 그런 곳에서 각광받던 시장주의를 이제 막 산업화의 걸음마를 뗀 한국에 그대로 적용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도덕적인 국가’를 전제로 하는 케인스주의도 정답은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사고의 딜레마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유길준의 등장은 그래서 더 반가웠다.

유길준은 1856년생, 그는 1956년생이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스물여덟이던 1884년과 1984년 하버드에 왔다. 지인과 함께 찾아간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 시 피바디박물관에서 처음 유길준의 흔적과 마주했다. 그는 유길준의 여정을 상세히 전했던 이광린의 논문(1967년)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구한말 최고의 개혁지침서였던 ‘서유견문’을 만났다.

유길준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조선을 근대화할 것인가’였다. 100년 후 같은 곳에 선 그는 ‘저 권위주의적 체제에서 헤매는 한국을 어떻게 정상화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사실 유길준의 조선과 그의 한국은 그리 다르지 않아 보였다. 80년 봄 출정 선언문에서 ‘1914년 세대’가 환생한 것처럼, 100년 전 조선 청년이 그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 듯했다.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100년 전 청년이 국가를 그리 걱정했는데 100년 후 청년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가 사회학적 미션을 준 겁니다.”

유길준이 말한 ‘시세(時世)와 처지(處地)’는 자연스럽게 그의 사고와 이론에서도 핵심 개념이 됐다. 그는 최근 펴낸 ‘이분법 사회를 넘어서’(다산북스)에서 “시세와 처지는 오늘날 한국의 이념투쟁을 종식시키는 데에 꼭 필요한 말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좌·우파가 이념에 집착하기보다 시세와 처지를 고려한 ‘공동구역’(공통 과제, 공통 인식)을 확인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한 손에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를 낀 채 학자의 길로 들어섰다. 만하임은 그의 첫 등불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막상 학문을 배우겠다고 찾아간 미국에선 조선 청년 유길준과 ‘서유견문’이 그의 사고를 지배했다. 그는 그래서 그들과의 만남을 ‘엇갈린 운명’이라 부른다.

○ 낭만적 기질

모교의 교수로 부임한 94년 봄. 그는 다시 인문대학으로 걸어 들어갔다. 16년 만에 만난 교수는 마찬가지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송 선생인가?”

그는 에세이집에서 “그 짤막한 확인에 ‘돌아왔습니다’라고 했는지 ‘돌아갔습니다’라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사실 사회과학도가 잠시 문학으로 외도를 했었는지, 아니면 문학도가 오래도록 사회과학에 머물러 왔는지 그조차도 확신이 없었다.

참았던 질문, 은퇴 후 문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인지를 물었다. 그가 답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싶습니다.”

송호근은 여전히 문학과 사회학의 ‘공동구역’을 찾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송호근#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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