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시인’ 문정희 “물을 통해 독자와 하나돼 흠뻑 젖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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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8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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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과 산문집 함께 펴내

문정희 시인은 “젊다는 것에 대한 가치가 커진 세상이다. 나도 젊다. 수치(나이)가 아니라 용기와 모험이 젊다는 것의 잣대라면 나는 여전히 젊다”고 말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문정희 시인은 “젊다는 것에 대한 가치가 커진 세상이다. 나도 젊다. 수치(나이)가 아니라 용기와 모험이 젊다는 것의 잣대라면 나는 여전히 젊다”고 말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시인 문정희(65)는 ‘물의 시인’이다. 20여 년 전부터 물에 비친, 물 속에 들어있는 원형적 심상을 시로 풀어내려고 고심했다. 1993년 발표한 박사논문도 ‘서정주의 시 연구-물의 심상과 상징체계를 중심으로’였다. 그가 물의 도시인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갔다. 카포스카리대가 초청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한 작가 초청 프로그램에 참여해 지난해 가을 무렵 3개월을 지냈다.》

시인의 눈에 베네치아는 “관능적인 물의 도시이지만, 관광객에게 자신의 비루해진 늙은 몸을 보여주는 ‘창녀’ 같기도 했다”. 그가 베네치아의 습습한 고독과 자발적 유배의 시간을 담아 2년 만에 열두 번째 시집 ‘카르마의 바다’(문예중앙)를 펴냈다. 14년 만의 산문집 ‘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다산책방)도 함께 나왔다. 등단 43년째를 맞은 여류시인의 쉼 없는 문학적 정진의 원동력이 궁금해 지난 주말 그를 만났다.

시인은 물에 자신을 이입하고, 결국 물과 하나가 된다. 시를 읽는 독자들도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 물과 물이 만나면 결국 물이 되는 것처럼. “물의 원형적 심상은 생명, 정화, 갱생이에요. 물방울 하나에 사랑, 상처, 고통, 모험, 그리고 제 카르마(업보)가 들어있죠. 올림픽 양궁을 보면 화살이 10점 과녁에 들어가는 순간 화살과 과녁, 궁사가 전혀 다른 물질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것 같아요. 제 시집을 통해서도 물과 물을 쓰는 저, 그리고 물을 읽는 독자가 하나가 되고 흠뻑 젖었으면 좋겠어요.”

물의 이미지는 ‘눈물’과 ‘바다’로 압축된다. 이들은 수동과 능동, 내향과 외향 등으로 대립되며 다채로운 변주를 이끌어낸다. ‘많은 바다를 건넜지만/눈물을 다 건너지는 못했다//(…)//나는 모르겠다/나는 아직도 눈물을 건너고 있다/눈물이 마르면 눈부시게 하얀 소금꽃이 필 것이다’(시 ‘소금꽃’ 일부)

‘살아 있다는 것은/파도처럼 끝없이 몸을 뒤집는 것이다/내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몸을 뒤집을 때마다/악기처럼 리듬이 태어나는 것이다’(시 ‘살아 있다는 것은’ 일부)

문 시인은 시원시원하고 활달한 성격이다. 하지만 “자신이 눈물과 바다 중 어디에 가깝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눈물”이라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대부분의 사람이 저를 ‘바다’로 보지만 사실 ‘눈물’에 가까워요. 고독과 비감 속에서 시를 쓰는 에너지가 나옵니다. 가수 싸이가 ‘싸이와 박재상(싸이의 본명)이 다르다’고 하는 것처럼 시인 문정희와 인간 문정희가 다른 거지요.”

산문집에는 해외 체류 경험을 주로 적었지만 여행기라기보다는 시작노트에 가깝다. 인상 깊었던 순간을 적고, 그 느낌으로 썼던 시를 뒤에 덧붙였다. “제 시가 배태됐던 흙의 이야기를 모았어요. 잡다한 일상보다는 제 시 이야기를 다정하게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시인은 고교 때부터 문학 천재로 불리며 미당 서정주(1915∼2000)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쉼 없이 시작 활동을 해온 그는 “저처럼 호기심 많은 사람이 40년 넘게 시만 ‘팠다’. 어떤 의미에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시를 얻었다는 생각도 한다”고 말했다.

“미당 선생은 제게 ‘조그만 재능으로 봉우리는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노력이 없으면 산맥은 만들 수 없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시를 쓰는 손이 무르익어 숙수(熟手)가 된 것 같아요. 제게 허락된 남은 시간 동안 시를 여한 없이 쓰고 싶어요.”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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