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든 2.1㎡씩 드릴겁니다… 글방 만들어 맘껏 꿈꾸라고…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4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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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 서·동 시집’ 완역서 펴낸 전영애 서울대 교수, 작은 ‘글쓰기 공동체’ 조성 나서

《 “멀리서 이 비를 뚫고 왔는데… 밥은 해먹여야지.” 봄비가 보슬보슬 내린 21일. 경기 여주군 강천면 걸은리의 낡은 한옥에 들어서자 그는 부랴부랴 밥부터 차렸다. 묵은 된장을 보글보글 끓여내고 오이와 봄동을 숭숭 썰어 솥밥과 함께 내온 손은 시골 아낙의 손처럼 투박했다. 》
전영애 교수의 한옥에서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정자 ‘시정(詩亭)’. 이 옆에 읽고 쓰는 사람들의공동체 ‘여백서원’을 만들 생각이다.
전영애 교수의 한옥에서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정자 ‘시정(詩亭)’. 이 옆에 읽고 쓰는 사람들의공동체 ‘여백서원’을 만들 생각이다.
전영애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61)는 7년 전부터 폐농가를 수리하고 낡은 가구들을 주워와 꾸민 이 한옥에 머문다. ‘서울을 벗어나 숨 쉴 수 있는 한 뼘의 공간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부엌, 침소로 쓰는 다락방, 서가가 놓인 마루, 손님방이 나란히 놓인 한옥이다. 여기에 학생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는 ‘MT방’을 조립식으로 붙였다. 개나리가 울타리를 이루고 댓돌 옆엔 흙 묻은 고무신들이 놓여 있다.

시인이기도 한 전 교수는 지난해 6월 동양인 최초로 독일 바이마르괴테학회가 수여하는 ‘괴테 금메달’을 받았다. 최근에는 ‘괴테 서·동(西·東) 시집’의 시편과 산문편을 모두 담은 완역서(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를 출간했다. 헨드릭 비루스 독일 브레멘야콥스대 교수와 공저로 연구서 ‘괴테 서·동 시집 연구’도 펴냈다. ‘서·동 시집’은 괴테가 14세기 페르시아 시인 하피즈의 시집에서 영감을 얻어 쓴 239편의 시와 오리엔트론(論)으로 구성됐다. 서양과 동양의 화합을 상징하는 제목처럼 모든 인류의 문학을 실현한 괴테 말년의 역작이다.

“19세기 초 작품인데 당시 그 어떤 문학에서도 이토록 열린 시각을 찾아보기 어려워요. 괴테의 열린 세계관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해요. 괴테는 낯선 것을 낯설게 둘 뿐 익숙한 곳으로 억지로 끌어오지 않았어요. 그럼으로써 문화는 풍요로워지죠.”

괴테의 열린 세계관을 반영하듯 전 교수의 강의는 서울대 학생들 사이에서 ‘열린 수업’으로 인기가 높다. 그가 가르치는 교양과목 ‘독일 명작의 이해’에서 학생들은 작품을 읽고 자유롭게 토론하며 학기가 끝날 때는 개인문집을 한 권씩 엮어낸다. 전 교수는 매 학기 학생들과 함께 ‘파우스트 MT’라는 이름으로 그의 한옥 ‘MT방’에서 1박 2일간 파우스트를 각색해 공연하거나 글을 낭독하는 행사도 연다. 이러한 열정을 인정받아 그는 지난해 서울대 교육상을 수상했다.

전영애 교수는 강의가 없을 땐 경기 여주군의 낡은 한옥에서 글을 쓰거나 밭일을 한다. 아무 때나 제자와 지인들이 찾아와 머문다. 부엌 냉장고에 붙어 있는 자전거열쇠 비밀번호 메모지가 집주인의 넉넉한 인심을 보여준다. 여주=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전영애 교수는 강의가 없을 땐 경기 여주군의 낡은 한옥에서 글을 쓰거나 밭일을 한다. 아무 때나 제자와 지인들이 찾아와 머문다. 부엌 냉장고에 붙어 있는 자전거열쇠 비밀번호 메모지가 집주인의 넉넉한 인심을 보여준다. 여주=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전 교수는 누구나 열린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는 ‘읽고 쓰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구상 중이다. 우선 이 한옥의 집필실 열쇠를 학생과 지인에게 쥐여주며 자연을 벗 삼아 글을 쓰게 하고 있다. 지난해 연구년을 맞은 그가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고등연구원으로 떠나며 집을 비운 사이에도 제자가 한 달간 머물며 책을 썼다. 올해부터 매년 5월과 10월 마지막 토요일에는 누구나 와서 글을 낭독하고 이야기하는 행사를 꾸릴 예정이다. “5월 말엔 마당에 불두화가 예쁘게 피거든요. 아무도 안 올지도 몰라요. 하지만 여기까지 내려온다면 (이곳이) 얼마나 절실한 사람이겠어요.”

한옥에서 걸어서 30분 거리엔 자그마한 땅을 마련해 한 칸짜리 정자를 짓고 ‘시정(詩亭)’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가로 2.1m, 세로 2.1m(각각 7자) 크기의 실내에 앉은뱅이책상 하나가 전부지만 그 이름처럼 전 교수에겐 시를 짓는 우주다. 읽고 쓸 공간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을 위해 2년 전 작고한 부친의 호를 딴 ‘여백서원(如白書院)’을 이곳에 세울 생각이다. 꼭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땅 2.1m²를 제공해 스스로 집짓게 한다는 계획이다.

이곳보다 먼저 독일 바이에른 주 파사우의 도나우 강가에 최근 ‘여백서원 파사우 분원’이 생겼다. 20여 년을 교류해온 라이너 쿤체 시인(79)의 집 뜰에 ‘시정’과 같은 모양으로 정자를 지어 선물했다. 쿤체 시인의 집필실이 된 이곳은 훗날 다른 독일 문인들의 공간으로 쓰일 예정이다.

전 교수는 “삭막한 시대에 주춧돌을 놓고 자기만의 공간을 만드는 뿌듯함을 공유하고 싶다”며 빗속에서도 소나무 모종을 심기 위해 고무장화를 신었다.

여주=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괴테 서·동 시집#전영애#작은 글쓰기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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